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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열음 Apr 29. 2024

여덟 번째 재주넘기

참을 수 없는


습기, 꽉 막힌 숨, 지하철, 축축한 손, 기름진 얼굴, 꽉 끼는 바지, 사람들의 무표정, 목 막힌 자유, 마음껏 뻗어나갈 수 없는 상태, 나를 존중하지 않는 마음, 남을 존중하지 않는 마음, 말 뿐인 말, 거짓 섞인 미소, 길 잃은 마음



참을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하다가 내가 그것들을 얼마나 많이 참으며 살아왔는지를 떠올린다. 너무 많아서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어쩌면 참다 못해 적응된 것들이 일상이라는 이름을 갖는지 모른다. 그중 좋아지는 일이 있다면 감사할 따름이고.


주로 집밖에서 참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집안에서는 참지 않는다. 무엇이든 늘어뜨리고 힘을 풀고 혹은 아예 격을 차리고 실로 내 몸에 꼭 맞는 상태를 유지한다. 집에는 습기도 없고, 기름진 얼굴도 없으며, 꽉 끼는 바지나 거짓 섞인 미소도 없다.


문득 아주 지난한 외출 후에 집을 다다를 때쯤 실감이 나는 것이다. 도어락을 치는 순간 나는 자유다…! 진득한 화장을 지워내고 자국 남은 바지를 벗어던지며 안경을 쓰고 소파에 앉는다. 루틴대로 착착 움직이는 순간 이미 충분하게 채워진다. 덜어낼수록 채워지는 마법 같은 경험은 집에서만 이루어진다.


이따금씩 집에서 길을 잃는 순간도 있다. 집밖에서의 무언가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내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순간, 벅찰 만큼 바쁘게 돌아다녀야 할 내일, 지난번 외출 이후로 계속 곱씹고 있는 남의 말을 생각하면 그렇다.


그러나 나의 몸 바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그래서 아직까지 큰 위험을 당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내가 정말 참을 수 없는 건 나를 존중하지 않는 누군가의 오만을 맛봤을 때… 그로 인해 내가 깎이고 무뎌지고 마음껏 펼쳐지지 못할 때다.


무엇이든 자유를 제한당하는 상태를 가장 끔찍하게 생각한다.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은 다르니까. 자유 없는 나는 죽은 몸이다. 새까만 영혼이 된다. 그러면서 느끼는 것이다. 누군가의 존중 없이도 자유로울 수는 없을까.


결론은 그럴 수 없다. 누구도 유일한 존재로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혼자서도 무탈하고 윤택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나를 존중하지 않는 오만일 것이다. 그래서 사는 내내 사랑하는 사람의 지지가 꼭 필요하다. 중요하지 않은 사람의 오만쯤은 뭉개고 살 수 있도록, 똘똘 뭉친 사랑을 필요로 한다.


그 안에서 마음껏 펼쳐지고 표현되는 나를 동경한다.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느리고 천박한 모습까지도 기꺼이 참아주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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