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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열음 May 09. 2024

아홉 번째 재주넘기

주제: 내가 사랑하는 것들

Maybe sometimes, we got it wrong, but its alright

The more things seem to change, the more they stay the same Oh, dont you hesitate


Girl, put your records on, tell me your favourite song

You go ahead let your hair down


<put your records on>, corinne bailey rae



낯선 도시를 지나며 가장 익숙한 노래를 듣는다. 집으로부터 가장 멀리 떠나있던 순간에 매일매일 거르지 않고 들었던 노래를. 아이유의 ‘팔레트’에서 다른 건 몰라도 여전히 ‘코린‘ 노래는 좋더라, 했던 코린의 노래.


이걸 들을 때면 저항 없이 어떤 장면을 향해 간다. 아주 외딴 나라의 곁가지 도시에서 무작정 한달을 살아보겠다고 결심했을 때, 막상 살아 보니 생각보다 막막해서 입이 텁텁했을 때. 아무런 할일 없는 아침에 일어나 샤워하며 무한반복했던 날들. 용기는 이따금씩 외딴 곳에서 온다. Girl Put your records on. Let your hair down. 무수한 반복 속에 정신을 차린 후에야 겨우 글을 쓰러 갈 수 있었다.


일상의 반복. 반복 안에서 나는 마침내 자유로워진다. 그걸 알면서도 일순간 루틴이 지겨워질 때면 무작정 떠나버리는 상상을 한다. 반복 안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다. 아침에 일어나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의 물건과 공간 사이를 누비며 졸리지만 분명하게 움직이는 것, 잠들기 전까지 푹 꺼진 소파에서 푹 익을 만큼 쉬다가 잠에 드는 날들. 루틴은 지켜져야만 한다.



너무 투명한 무궁화호 창문 너머로 무명의 도시를 지난다. 언젠가 이 낯선 도시들을 여행하는 날이 올까. 아무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도시에 갑자기 던져지는 상상을 한다. 언제나 짜릿하지만 실제로 던져지면 두통에 시달릴 걸 안다. 사무실을 떠난 지 두 시간째,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상상을 싣고 간다. 여전히 집은 멀리 있다.


어떤 날엔 집에서 가장 멀리 있던 날이 사무치게 그립다. 대부분의 날이다. 익숙한 정취를 벗어나 생경한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내고만 싶다. 사무실의 모두가 거북목이 될까 두려워하며 노트북을 째려보고 있다. 그 사이에서 당돌하게 생각한다. 내가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떠나는 것이라고. 여행지에서 만난 한국인 가이드 언니들을 떠올리며. 


바르셀로나에 정착해 세상 가장 작은 목소리로 우리를 이끌었던 그 언니는 지금도 길 잃을 영혼들을 잘 선도하고 있을까. 그 언니가 입었던 코발트 블루 셔츠가 맘에 들어서 결국 찾아내고 말았는데. 이제 그 셔츠를 꺼낼 날씨가 코앞에 와 있다. 


생각해보니 어쩌면 길을 잃은 건 그 언니 쪽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여행객은 돌아가야 할 길을 정확히 알고 있을 테니까. 여행객이 철저한 객이라면 언니는 여행자겠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지만 아예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 삶인지 여행인지 헷갈리는 지점에 있을 테니.


그 언니는 어떻게 한국을 떠났을까. 한국에선 파티시에였다고 들었는데. 스페인 빵 되게 퍽퍽하고 맛 없던데. 빵을 만들던 사람이 유독 빵이 맛 없는 곳에서 살 만큼 큰 마음을 먹었나 보다. 집으로 향하는 무궁화호에서 내 마음은 누구보다 옹졸해진다. 옆자리에 앉은 아줌마가 죽을 것처럼 기침을 한다. 두어 번 째려보지만 어쩔 텐가. 가방에 있는 물을 떠올린다. 먹던 물을 드렸다간 내 쪽을 향해 기침을 할 것만 같다.


언젠가 아주 낯선 도시에 살게 된다면 여행하며 글을 쓰고 싶다. 여행 에세이스트가 되면 안 될까. 안 될 이유는 많은데 될 이유는 딱히 없는 것 같아 서럽다. 기차에서 코린 노래가 셀 수 없이 반복되고 있다. 생각하는 동시에 기차에 불이 꺼진다. 앞으로 집에 도착하기까지 한 시간 반. 권진아의 여행가를 듣기로 한다. 여전히 느리지만 분명히 집을 향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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