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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열음 Sep 21. 2024

이제는 복구될 차례

<누벨바그: 새 물결 프로젝트> 1편

첫 번째 물결: 미디어 디톡스 / 책을 일상으로 가져오기


  

영상물은 하루에 한 편만 볼 것, 영상을 보지 않는 대신 책을 읽을 것. 3일간 두 가지를 지켰다. 무명의 독자가 미디어 디톡스를 하고 싶은 이유는 '생각하며 살기 위해서'라고 한다. 본격적으로 생각이란 걸 하며 지냈다. 그 첫 날의 기록을 담았다.




이른 아침,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은 눈에 띄게 고요하다. 그저 추위에 떠는 기다림만 있을 뿐. 그러나 위태롭지는 않다. 그곳에 멀뚱히 서 있는 동안 충만한 아침을 맛본다. 아침이 오기만 하면 자연은 채워진다. 비워내고 채워내고를 반복하다 다시 채워지는 시간. 차가운 숨을 마시고 뜨거운 숨을 뱉으며 밤이 물러났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카페 알바를 가는 버스. 앞에 앉은 여자애가 숏츠를 본다. 분명 내가 미디어 디톡스를 시작했다는 걸 아는 것이다. 이어폰을 끼지도 않았다. 일부러 보지는 않았지만 소리만 들어도 <지붕 뚫고 하이킥>의 빵꾸똥꾸다. 그 시트콤 본방송을 챙겨보던 게 벌써 14년 전이다. 이 여자애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시절이다.


소리만으로도 정신이 흩어진다. 조각나고 흩어져 마침내 흩뿌려진다. 몇 시간 동안 여과 없이 영상을 보면서 느낀 감정들이다. 복잡한 머릿속을 손쉽게 외면하고 영상에 빠져들던 순간을 복기한다. 안락하지만 반갑지는 않다. 며칠 간 독자들의 도움으로 나는 머릿속을 정리하게 될 것이다. 이제는 복구될 차례다.


*

알바가 끝나고 집에 오자마자 수육을 삶는다. 할머니가 보내주신 겉절이와 김장김치가 있기 때문이다. 배고픈 동생이 수육을 기다리고 있다. 고기를 삶는 데 50분이 걸릴 텐데... 그 동안 무얼 해야 하나. 무한도전이나 보고 싶다. 헤프고 가볍고 무책임한 웃음이 벌써 그립다.


첫 날부터 고비다. 외출복 차림 그대로 침대에 앉아서 책을 보기로 한다. 수육을 먹고 다시 카페를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거실에 앉아 유튜브를 보겠지만 오늘은 동생에게 거실 자리를 빼앗기고 독자에게 유튜브를 빼앗겼다. 침대에 앉아 책을 펼친다. 잘 때 말고는 아는 척도 안 하던 그 침대다.


요즘 읽고 있는 책은 유지혜 작가의 <우정 도둑>이다. 주현이 선물해 준 책이라 아껴 읽고 있다. 무척 두꺼운 책이라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아껴 읽게 된다. 오늘도 다행히 이 책이 시간을 견인한다. 마침 작가도 미디어에 관해 말한다. 수육과 거실과 무한도전을 잠시 잊고 빠져든다.



"무한한 스크롤 사이에서 너무 많은 것이 화려하게 범람했다가 급하게 사라진다. 이 때문에 당신의 감정은 단 10분 사이에 널을 뛴다."


"순서도 맥락도 생략된 게시물들 사이에서 당신은 느끼는 법을 잊는다.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게시물들은 당신의 시간을 두고 경쟁하고 있다. (…) 당신은 이미 어떤 위기를 느끼고 있다. 그 위기는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을 초월한 전 인류의 새로운 생활방식이다. 마치 뜨겁고 매운 음식을 매일 먹는 일과 같다. 짜릿하고 재밌지만 어딘가 허전해."


- 우정 도둑, 유지혜, 127쪽


*

큰일이다. 유지혜 작가도 내가 미디어 디톡스 중이라는 걸 아는 게 분명하다. 책을 읽는 동안은, 정확히는 책에 몰입하는 동안은 잡생각을 잊는다. 모든 몰입의 순간이 그렇지 않나. 운동이란 것도… (잘은 모르지만) 신체의 감각이 극대화되니 다른 생각이 들어올 틈을 잃는 것 같던데. 운동은 자주 하지 않지만 책은 자주 읽는 편이다. 몰입의 순간은 희소하면서도 황홀하다.


핸드폰이 아예 보이지 않도록 손에서 멀리 두는 연습을 해 본다. 핸드폰을 쥐면 늘 그랬듯 분주해질 것이다. 눈만 뜨면 페이스 아이디로 바로 연결되니까. 카톡을 확인하고 바로 인스타, 네이버 검색, 다시 카톡, 갑자기 날씨, 결국은 유튜브로… 사용하던 앱을 백그라운드로 넘기고 빠르게 다음 앱으로 이동한다. 스스로를 효율적인 인간이라고 착각하지만 사실 당장 필요한 건 무엇도 없다. 그저 관성으로 빠르게 움직일 뿐이다.


무엇이든 속도가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카페에서 일할 때도, 책을 읽을 때도, 글을 쓸 때도, 집안일을 하거나 핸드폰을 할 때도. 속도가 보상을 약속한 것처럼, 실상은 손실에 가까운데도. 아주 찰나의 성취감만 있을 뿐이다. 어느 편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멀티 플레이어가 되어가고 있다. 천천히 음미하는 법을 잊는다.


*

저녁을 먹는 동안 동생과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아주 긴 영화라서 이걸 봐도 괜찮을지 고민했지만, 핸드폰은 보지 않고 영화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생각하며 살기 위해 미디어 디톡스를 하라는 거지, 삶을 멈추라는 것은 아닐 테니까…) 요즘 계속 보고 있던 어벤져스 시리즈다. 화려한 액션보다는 히어로의 일상과 유머에 감응하고 있다.


이번 시리즈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상실과 종말에 유머를 곁들일 수 있는 건 히어로의 특권이다. 세상의 끝을 이야기하면서도 맥이 빠지지 않는 힘은 무엇일까. 행성 곳곳을 돌아다니며 인피니티 스톤을 모아대는 악당들은 얼마나 고귀한 흑심을 품고 있나. 대학살을 저지르면서도 자비를 베풀고 있다고 믿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자신이 얼마나 고귀하다고 생각하나요.


고귀함과 천박함에 대해 생각한다. 영화 속에서(어쩌면 현실에서도) 천박한 시민들은 세계가 망해가는 것도 모르고, 마치 우리가 가진 것처럼 보이는 자원을 낭비하며 살아간다. 상실과 종말과 죽음이 늘 곁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독보적인 상업 영화에도 건져올릴 메시지가 있음을 느낀다. 메시지는 어디에나 있지만 찾지 못할 뿐이다.


*

그러나… 수육을 먹으며 영화를 보고, 상을 치우고 책을 다시 읽었는데도 저녁 7시다. 다시 고비다. 책을 보는 동안 구부렸던 목이 아파온다. 다리를 꼬고 허리도 숙이고 있었다. 막막함에서 비롯한 숨을 내쉬고, 자세를 고쳐 잡고 아이패드를 켠다. 이번엔 전자책으로 <데미안>을 보기로 한다. 유지혜 작가의 인생책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읽다 만 부분을 펴고 기억을 되살린다. 그래서 데미안이 누구였더라… 주인공 이름이 뭐더라… 기억을 쫓다가 책을 덮었다. 나는 이제 정말로 쉬고 싶다. 생각하기를 멈추고 싶은데. 아직 독서를 완전한 쉼의 영역으로 가져오지 못했다. 읽기 위해 읽는다기보다는… 잘 쓰기 위해 읽는다는 감각을 버릴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독서는 여전히 해야 할 일에 가까운 듯하다.


몸과 마음을 그저 쉬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누워서 유튜브 보기였다. 가만히 누워서 티비를 보며 헤실거리고 싶다. 생각해보니 평소에는 저녁 먹을 때부터 잠들 때까지 유튜브를 본 것 같다. 최소 4시간이다. 그 시간이 전부인 것도 아니다. 아침, 점심마다 틈틈이 본 것까지 따지면 족히 5-6시간은 될 것 같다. 무참히 흘려보낸 시간은 다시 돌려낼 수도 없다.


아직 저녁 식사를 소화하지 못했지만 운동을 해보기로 한다. 잠들 시간이 멀었기 때문이다. 가끔 하던 홈트로 한혜진의 15분 운동 루틴이 있는데, 짧고 급박한 운동이긴 하지만 끝나고 나면 개운하게 헥헥거린다. 겨울 아침에도 땀을 뻘뻘 흘리게 하는 운동이라 애용하게 되었다.


(결국 책으로도 해결되지 않은) 잡생각을 비우고 새 심신으로 인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격렬한 운동.


운동을 마치자 무채색이었던 세상이 다시 색을 입는다. 개운한 몸과 마음으로 우정 도둑을 마저 읽는다. 절반 이상을 읽고 나니, 드디어 작가가 말하는 우정의 주인을 찾아냈다. 이 두꺼운 책을 이토록 빠르게 격파하게 될 줄 몰랐다. 영상 대신 글로 채우는 시간이 아직까진 낯설지만 기쁘다.


*

3일치 기록을 전부 드리려고 했지만 너무 길어져서 우선 첫 날의 기록만을 보내드립니다. 지난 금요일부터 이 챌린지를 지속했는데요. 일주일간 지속하려 합니다. 의도했던 바대로 생각이 무르익는 걸 느끼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즐겁게 읽어주시고, 여러분도 저와 비슷한 물결에 휩쓸려 살아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챌린지가 저 혼자만의 일이 되지 않도록!



발송일 2023.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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