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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열음 Sep 23. 2024

우아하게 소식하는 법

<누벨 바그: 새 물결 프로젝트> 3편

첫 번째 물결: 미디어 디톡스 / 책을 일상으로 가져오기



영상물은 하루에 한 편만 볼 것, 영상을 보지 않는 대신 책을 읽을 것. 5일간 두 가지를 지켰다. 무명의 독자가 미디어 디톡스를 하고 싶은 이유는 '생각하며 살기 위해서'라고 한다. 본격적으로 생각이란 걸 하며 지냈다. 오늘은 마지막 이틀의 기록을 담았다.




4일 차. 핸드폰을 습관적으로 만지지 않게 됐다. 처리할 일이 없으면 핸드폰도 보지 않게. 하루에 한 번 영상을 보는 시간은 여전히 소중하다. 전날부터 무엇을 볼지 고민한다. 그렇게 골라낸 영상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직전에 뭘 봤는지도 잊을 만큼 많이 보던 날에는, 오직 시간을 집어삼키는 데 급급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그냥 시간을 버리고 싶었던 것 같다. 영상을보는 동안 시간이 흐르지 않았으면 싶다가도, 이미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는 묘한 희열과 현타를 동시에 느꼈었다.


소식(小食)의 묘미가 이런 걸까. 회전초밥 집에서 비슷한 종류의 초밥들을 우악스럽게 먹다가, 한 그릇에 곱게 담긴 카이센동을 먹는 것 같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건 야금야금 먹는 일, 모아 두고 먹는 일, 속도를 늦추는 일이다.


미국 시트콤 <모던 패밀리>에도 핸드폰에 중독된 고딩, 헤일리가 있다. 한 번은 핸드폰이 고장난 헤일리가 반강제로 미디어 디톡스를 하게 되었던 적이 있다. 그는 핸드폰 없이 어떻게 살 수 있냐며 좌절했지만, 그동안 책도 보고 입맛도 되찾고 글도 쓰고 부모님을 다시 사랑하게 되었다. 물론 핸드폰을 고치자마자 디톡스는 끝이 났고 영영 없던 일이 되었지만 그 중 하나만 성공해도 좋을 것이었다.


*

집에 자주 있다 보니 요리도 자주 한다. 혼자 점심을 먹는 날에는 무조건 냉장고를 턴다.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을 만한 열정도, 돈도 없다. 오늘은 장칼국수를 만들어 먹기로 한다. 레시피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유튜브는 잠시 지웠으니 오랜만에 블로그를 찾았다. 요리를 시작하고부터 이름 모를 엄마들의 도움을 참 많이 받았다.


오랜만에 레시피를 검색하니 익숙한 블로거가 보인다. 잊었던 은사님을 만난 기분이다. 그분들의 가족과 밥상과 정성을 참고하며 무탈한 저녁들을 보냈다. 언제부턴가 블로그 레시피를 보지 않게 되었다. 대신 유튜브 숏츠가 그 자리를 채웠다. 블로그는 하나씩 내리면서 글을 읽어야 하고, 긴 영상은 멈춰가며 반복 재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간만에 블로그 스크롤을 내리며 뜨끈한 장칼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오늘 보게 될 영상 한 편은 어벤져스 앤드게임의 마지막 조각(진짜 길다). 모든 것을 잃었거나 잃기 직전인 주인공들을 보며 조금 슬퍼진다.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완다인데 일단은 정말 예쁘기 때문이고, 그의 이야기가 가장 슬프고 인상적이기 때문이다. 완다가 타노스를 마주한 순간, 차갑게 식은 분노로 You take everything from me... 라고 말할 때는 입을 막았다. 차가운 분노는 모질게 아프다.


어벤져스 시리즈를 집중해서 다시 보는 동안 몰랐던 사실을 많이 깨달았다. 처음 극장에서 볼 때, 그리고 집에서 반복해 본 무수한 시간 동안 흘려보낸 이야기와 사람들을 발견했다. 캡틴 아메리카가 그토록 바랐던 사람과의 일생을 보내고 돌아왔을 때, 그녀 이야기를 해주겠냐고 묻자 아니, 그 얘기는 안 할래. 하고 침묵해버리는 것도. 결국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쓰이지 않는 법이다.


*

며칠 전 도서관에서 빌려온 주택 관련 책을 읽었다. 부동산에 관한 건 아니고 진짜 집에 관한 이야기다. 제목은 <타이니 하우스>. A3 사이즈로 외국 잡지 같아서 끌렸다. 항상 도서관에 가면 계획보다 많은 권수의 책을 빌려오는데, 꼭 절반도 못 읽고 반납하게 된다. (2주가 그토록 짧은 시간이었나.) 이번엔 최초로 빌려온 책을 모두 읽었다... 그것 말고는 달리 할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타이니 하우스는 말 그대로 작은 집에 관한 이야기다. 미국에서 시작해 프랑스에도 열풍이 일었던 작은 집 살기 문화에 관한 책이다. 카라반 같기도 하고, 촘촘한 컨테이너 같기도 하고, 조립된 산장 같기도 한 집들에 바퀴가 달려 있었다. 어디로든 갈 수 있고, 어디서든 살 수 있는 집들. 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주거 형태라 신비했다. 집보다 땅이 중요한 나라에서는 쉽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주 다양한 형태의 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었다. 적어도 그 책을 읽은 내게는 선택지 하나가 더 생기는 것 아닌가. 나도 바퀴 달린 집에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누군가 불을 지르거나 창문에 돌을 던져 침입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끼어든다. 내가 안전하려면 타인의 악의를 필연 혹은 우연으로도 막아내야 한다.


작은 집에 대해 읽고 나서는 <건축가가 지은 집 108>을 읽었다. 집에 관심이 생긴 것은 아니고 도서관의 주택 관련 코너에 발을 들여서이다. 건축가가 지은 집들은 다른 듯 아주 비슷했다. 현대적이고 우아한 데다가 비싸보이는 집들이 가득했고, 신념으로 일하는 건축가들이 많아 보였다. 우리집에도 건축가가 한 분(아빠) 계신데 그는 집을 짓고 사는 일을 꺼려한다. 그냥 아파트가 편하고 좋대요.


이 책은 나를 30년 정도 일찍 찾아온 것 같다. 혹은 40년... 50년... 언젠가 오빠와 주택을 짓고 살 수도 있겠다는 말을 했었다. 당장은 아파트적 사고밖에 없는 내게 아주 먼 이야기 같았다. 그러나 오빠는 이미 부모님의 주택을 몸소 쌓아 올렸고, 부모님은 당신께서 직접 지은 집에 살고 계시는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지은 집에 산다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추억과 성취와 사랑이 샘솟을 것 같다.


굴러가는 작은 집도 보고 건축가가 지은 집도 봤는데 당장은 내 집에서 무엇을 할지가 더 고민된다. 일단은 간식을 먹으려고 기대 없이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지난 명절, 그러니까 9월의 추석에 선물받은 배가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깎아 봤는데 어떤 흠도 없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사실 어렸을 때부터 배를 깎는 일을 좋아했다. 배처럼 시원시원하고 끊기지 않게 잘 깎이는 껍질은 별로 없다. 있다면 참외 정도. 그 때는 배를 사 먹기도 했던 것 같은데...


생각해 보니 무슨 과일을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배라고 답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어쩌다 배가 이렇게 홀대받게 되었나. 배를 응용한 요리라고는 갈비찜 양념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화려한 딸기는 와플에도 들어가고, 케이크도 되고, 마카롱도 되는데. 탕후루 재료의 후보도 되지 못하는 배를 생각한다. 한 손에 들기도 묵직한 배를 조각조각 잘라 먹는다. 두 달이 지났는데도 이렇게 튼튼한 과일은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먹는 내내 의심을 거두지 못한다.


*

저녁으로 카레, 수육, 두부 김치를 해먹고 바로 글쓰기 모임에 접속했다. 약 2주 만에 주현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다. 서로의 글을 메일로 보내 읽고 감상을 적는다. 적어서 말한다. 편지 같고 시 같고 영화 같은 주현의 글을 들여다본다. 그의 글에 비하면 내 글은 기사다. 유려한 글을 쓰지는 못해도 족적만은 남기고 싶다는 마음으로 썼다. 꾸준하게 괜찮은 글을 쓰고 싶은 마음, 어쨌건 우리는 서로를 움직이고 있다.


글모가 끝나고 운동을 하기는 귀찮고, 시간은 10시인데 아직 잠이 오지 않아서 양다솔 작가의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을 읽는다. 그의 글은 쉽고 재밌어서 훌훌 읽힌다. 그걸 읽는 동안에 동생이 갑자기 콧노래를 부르며 집에 들어온다. 그리고는 자신이 잘 쓰지 않는다는 체크 목도리를 내게 준다고 한다. 무언가 기분 좋은 일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집에만 오면 이토록 투명해지는 사람이라니. 취했냐고 물었지만 아니라고 했다. 취하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좋은 걔는 곧 컴퓨터를 켜고 유튜브에 빠져들 것이다.


먼 방에서 유튜브 소리(게임 유튜버의 괴성이나 웃음 소리)가 들려오기 전에 잠들어야겠다. 걔와 비교했을 때 지금 나의 일상은... 꼭 드레싱 없는 샐러드 같다. 무력한 천국에서 잠드는 기분이다.


*

5일간 죽도록 책만 읽었다. 모든 찰나를 책으로 메웠다. 보통의 집에서는 가만히 앉아 생각하지 않는다. 집은 그런 공간이 아니다. 순수한 사유는 오히려 외딴 곳에서 일어난다. 카페 창가에서, 버스 안에서, 길바닥에서. 집은 채우고 달래고 비우는 공간이다. 5일간 늘어져있을 시간이 조금도 없었다는 게 버거웠지만, 적어도 낭비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 기간 동안 네 권의 책을 완독했고 한 권의 책을 시작했다. 전례 없는 기록이다. 수년간 유튜브와 영상과 미디어에 잠식되어 있던 사람에게 5일은 턱 없이 짧은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이만하면 되었다고 믿고 싶다. 며칠을 더 한다고 완전한 일상으로 스며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짧고 굵게. 다만 정신이 번쩍 들게.


온갖 궁금증이 드는 시간이었다. 지금까지 무얼 그렇게 열성적으로 보며 살아왔나, 집은 무얼 하는 공간인가, 쉰다는 건 무언가, 영상이 꼭 나쁜 건가. 단 하나 확실한 건, 숏츠를 보지 말아야겠다는 거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정말 버리는 시간인 것 같다... 물론 쓸데없는 시간도 필요하다. 집에서도 생산성만 추구하다가는 머리가 터져나갈 것이다.

*

그간 책에 대한 애정도 회복했다. 읽다 만 소설 <파친코>를 읽고 싶어서 마음이 분주했다. 드라마의 다음 편을 기다리듯 책의 내용을 상상했다. 도서관에 대출 예약을 걸어놓고 그 날만을 고대했다. 책 속엔 작가가 조명하는 역사의 순간이 너무도 선명했다. 거기엔 착취 당하고 배신 당하고 부재하며 지워지면서도 강인한 여성이 있고, 아프고 유약하고 선하고 신실하면서도 꼿꼿한 남성이 있다. 내가 읽은 부분까지는 그랬다. 책을 기다리며 고파하는 마음. 가장 순수한 욕망을 느꼈다.


*

첫 번째 물결을 마치는 소감... 드레싱 없는 샐러드를 먹으면 살은 빠지겠지만 생식이 꼭 몸에 좋은 것만은 아니다. 샐러드만 먹으며 다이어트를 하다간 폭식을 마주할 것이다. 미디어 디톡스에도 적절한 완급 조절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루에 한 편씩은 영상을 보기로 했으나 그것도 모자랐다.


영상을 폭주하지 않는 데는 꽤 거대한 의지가 필요하다. 그건 시작하는 힘이 아니라 멈추는 힘이다. 잘 여는 것보다 잘맺는 일이 중요한 것도 같다. 그래도 디톡스 꼭 해보세요.


스스로와 원만한 합의를 맺고 명쾌한 날들을 보내시길! 다음 편에서는 두 번째 물결로 돌아올게요.



발송일 2023.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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