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일기
퇴사 1일 차, 빨간 날이다. 모두가 쉬는 날이라 그런지 더 실감이 안 난다. 월요일쯤 되어야 실감날 것 같다.
어제는 친구들이 깜짝 퇴사 파티를 열어줬다…… 너무너무 소중하게 작은 케이크도 만들어주고 퇴사 관련 책도 선물해줬다. 생일 말고 누구한테 책 선물을 받은 게 너무 오랜만이라 정말 기뻤다. 퇴근하고 열한 시에 와준 애도 있고, 내가 요청할 때마다 기꺼이 만나주는 애들도 있었다.
얼마나 고마웠는지 내가 잠꼬대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ㅇㅇ아, 와줘서 고마워…”
무의식까지 감동 범벅이다.
이번주엔 계속 기력이 없다. 의욕도 없고 그냥 하염없이 피곤하달까… 평소에 체력 안 좋은 것과 별개로 우울하기까지 하다. 퇴사를 앞두고 심란한 걸까, 아니면 그냥 피로가 누적돼서 지친 걸까. 다음주에 생리할 것 같아서 이러나. 권고사직 때렸다가 다시 회사에 남으라는 대표님한테 질린 걸까…
오늘 종로 꽃시장에서 화분을 사고 동묘 구경을 했다. 누가 입다 만 옷더미들, 쓰다 만 수건들, 듣다 만 카세트테이프 같은 것들을 눈으로 뒤적였다. 물론 커피도 한잔 마시고서. 지난번에 왔을 때도 이번에 갔을 때도 손님에게 쌍욕을 하는 사장님들이 있었지만 여기선 어쩐지 웃음이 났다. 평소라면 무서워서 피해다녔을 것 같은데, 동묘에서 그 정도는 사람 사는 냄새 같다.
거리엔 미친 바람이 불었고 군데군데 땡볕이다. 사람에 채이고 햇빛에 익어서 실시간으로 지쳐가는 내가 익숙했다. 지친 건 내 몸일까 내 영혼일까. 앉을 때마다 부끄럼도 없이 흐억- 소리를 내는 내가 부끄럽다. 고통의 역치가 낮다는 오빠의 말이 자꾸 떠올랐다. 포기하지 않는 데서 끈기가 생기는 건데 포기가 너무 쉬우면 어쩌지. 되면 하고 안 되면 말고식 마인드.
철없이 지친 얼굴로 이번주 찬양 송리스트를 듣는다. 하나님 저 왜 이러나요… 끊임없이 떠오르는 물음표와 함께. 지난주까지만 해도 꽤 쌩쌩했던 것 같은데요… 당신의 사랑을 받은 사람인데 이렇게 힘없이 살아도 되는 건지 해서요. 그렇다고 집에만 있으면 더 우울한데요…
속으로도 웃음이 안나서 감사한 제목들을 생각해봤다.
1. 그렇게 그만두고 싶다고 했는데 그만두게 해주시고 실업급여까지 받게 됨
2. 퇴사파티 열어주는 친구들 있음
3. 어차피 어디로든 잘 가게 될 거라는 걸 앎
4. 포켓보이 같은 남친 있음…
5. 친구가 안 입는 옷 줬음
그 외에도 너무 많은데 지금은 이상하게 와닿지 않는다. 감사는 휘발되고 불평이 자꾸 남는다. 남의 불평도 자꾸 내 안에 쌓인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커튼에 가려진 창밖을 보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세상을 반만 보고 있나? 믿는 사람이라면 불행 없이 무조건 행복해야 한다는 생각, 하나님의 사랑을 전부 아는 것도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닌 상태, 그게 진짜 믿는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육체도 영혼도 체력이 필요하다. 잘 별러진 금속처럼 딴딴해지려면. 에너지나 기분 같은 것에 요동하지 않으려면. 건강하게 견디는 힘이 필요하다. 이번주가 힘들지 않았다면 이렇게 체력이 간절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앞으로도 웃고 찬양하고 여행하려면 길러야지. 사랑도 체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