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취향에 대한 궁금증은 14년 전부터 시작된다. 엄마가 사라진 시점에서 나는 아빠의 식성부터 제대로 파악해야 했다. 엄마는 갑자기 아팠고, 천천히 고통받았으며, 순식간에 죽었다. 나는 스트레스에서 기인한 유방암이 인간을 집어삼키는 과정을 단편적으로나마 지켜보았다.
열 살의 장녀였던 나는 엄마의 자리를 물려받았고, 아빠와 나와 남동생은 붕 떠올랐다. 삶의 구심점이자 풍요이자 우리의 ‘식’을 담당했던 엄마는, 남은 자들에게 삶의 지혜를 알려줄 틈도 없이 아픔만으로도 벅찼다. 유언인지도 몰랐던 엄마의 마지막 말은 ‘동생 때문에 하고 싶은 거 포기하지 말라’였고, 그 유언을 건져 올릴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은 엄마의 엄마였다.
엄마는 열 살의 내가 이해하기 벅찬 말을 남기고 떠났다. 이후 할머니의 말을 들어보니 어렸을 때부터 동생은 내 물건을 뺏는 입장이었고, 나는 고분고분 뺏기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그때 나는 나와 엄마와 할머니가 한 줄기로 이어져있음을 느꼈다. 그건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막막한 세계를 함께 떠안는 비장함이었다.
한 집에서 살아갈 나의 원가족끼리는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다. 할머니는 힘없는 목소리로 자기 딸의 마지막 말을 손녀에게 각인시켰다. ‘방금 그거 엄마가 유언 남긴 거야’. 그런 못된 말을 하는 할머니가 미웠다. 아마 엄마가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엄마가 없는 집의 엄마가 없는 식탁은 참으로 초라했다. 요리에 흥미도 재능도 용기도 없었던 아빠는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그는 돈을 벌어야 했고,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누구든 만나야 했다. 그래서 내가 기억하는 우리 남매의 저녁 시간은, 맞은편 아파트에 사는 고모네 집에 락앤락을 들고 가서 밥과 국과 반찬 따위를 채워오는 것이었다.
고모의 요리는 두부콩나물국이나 배추된장국 같은 것이었는데, 매일 네 명의 아이들에게 밥을 먹여야 하므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 음식들은 아무리 먹어도 힘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계속 자랐다. 초록색 테두리를 가진 뿌연 락앤락이 국으로 채워지는 동안 나는 공허함과 모멸감과 눈치를 꾹꾹 눌러 담았고, 조금은 위축된 어깨와 감사하다는 인사를 뒤로 한 채 동생의 손을 잡고 나왔다.
고모나 고모부는 한 번도 눈치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의사와는 별개로 나는 눈치를 보는 어린이였다. 아빠가 고모에게 살갑게 잘하는 것도 아니고… 고모가 교회를 다닌다고는 하는데 어쩌면 이것도 하나의 구제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내가 열 살이었고 동생은 일곱 살이었다. 매일 고모네 집에서 좋아하지 않는 반찬과, 내 양보다 많은 밥공기를 비우고 나오는 일은 버거웠다.
대체로 내가 기억하는 평일 저녁에는 아빠가 없었고, 대신 그가 일을 한다거나 약속이 있다거나 하는 전화를 받았다. 그때만 해도 집마다 두꺼운 무선 전화가 있었는데, 매일 저녁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언제 오냐고 물었던 것 같다.
하루는 아빠가 몹시 지치고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온 날이었다. 그는 아마 냉장고에 있던 차가운 국을 데워 먹기 싫었던 듯하다. (그 당시 아빠는 이전 직장에서 밀린 월급에 대한 소송도 진행 중이었다) 비록 불만 올리면 금세 데워질 것이 분명했지만, 피곤한 와중에 그 정도의 일을 할 사람이었다면 아빠는 요리도 할 줄 알았을 것이다.
나는 기꺼이 라면을 끓여주었고, 허기가 다 채워지지 않았던 아빠는 전날에 고모네서 받아온 찬밥을 말아먹기로 했다. 나는 그때 살림에 대한 지식이 0에 수렴했기 때문에 락앤락에서 꺼낸 밥을 밥솥에 펼쳐두지 않고 그릇째로 넣어두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10살이었고… 그런 걸 나한테 바라서는 안 됐다고 생각한다. 한참 동안 습기 없는 보온 상태에 놓인 밥은 말라비틀어져있었고, 아빠는 그게 서러웠나 보다.
나는 그게 누군가를 서럽게 할 수 있는 일인지도 몰랐다. 밥을 말아먹겠다는 아빠에게 ‘아빠는 밥도 말아먹네~ 좋겠다’라는 둥의 말을 했더니 아빠가 화를 냈다. 말라비틀어진 밥을 먹는 게 뭐가 좋냐며. 나는 그때부터 마른밥이 내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묻기 시작했다. ‘아빠는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뭐야?’ 아빠가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 미리 알아두고, 평일 낮에도 자유롭게 가스를 쓸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척척 밥상을 차려내리라 다짐하면서. 그리고 나의 기대에 의하면, 이 질문은 다음 질문으로 이어져야 했다.
‘그럼 승희는 무슨 음식이 제일 좋아?’ 아직 이런 질문을 받지 못했다. 14년 전의 나와 동생은 아빠 없이 불을 써서도 안 됐고, 컴퓨터를 30분 이상 할 수도 없는 귀여운 어린이에 불과했다. 한 어린이는 아빠에게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물었고, 다른 어린이는 아빠에게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받았다.
동생은 고기보다 해산물을 좋아했고, 그래서 우리의 주말 저녁엔 회가 올라오는 날이 많았다. 마트에서 파는 회는 꽤 특별한 식사였고, 나 역시 고기보다 해산물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그때부터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문답 끝에 알게 된,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잘 끓여진 찌개나 탕, 건강식이다. 이를 테면 푹 고아진 김치찌개, 짜글이, 염소탕, 쌈밥 따위의 것. 동생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각종 해산물로 된 찜, 탕, 튀김이다. 이를 테면 맵지 않은 해물찜, 알탕, 텐동 따위의 것.
어쩐지 나는 싫어하는 음식도 없다. 이 글을 쓰기 전에도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생각해 보았지만, 싫어하는 음식을 찾는 게 더 낫겠다 싶을 정도로 음식이라면 모조리 사랑하는 게 내 인생관이었다. 모든 음식을 먹을 줄 아는 게 얻어먹고 살기 편했기 때문일까. 아마 그런 것보단 그냥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기 때문인 것 같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게는 우리 집의 ‘식’을 모조리 담당하고 싶은 당찬 마음이 있었다. 마음만큼 부지런하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아빠의 여자친구, 고모, 할머니 등으로부터 음식을 받는 사치를 자주 누렸다. 그렇게 수많은 여자들이 나를 부엌에서 꺼내주었다.
아직도 아빠와 동생이 싫어하는 음식, 좋아하는 음식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의 취향을 파악할 책임이 내게 있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친척들을 만나면 모두들 내게 무얼 해 먹고 사는지 묻곤 한다. 아마 아빠에겐 물어보기 어려웠을 거고, 동생은 대답할 줄 몰랐을 것이다. 아니면 내가 열 살 때부터 우리 집의 공식 여성으로 인정받았거나.
외식이라도 하려면 나는 모든 음식이 싫지 않은 누나딸이니까, 쌈밥이나 해물찜 같은 것들을 주로 먹었다. 한 번은 내가 사준 짜글이가 맵다고 불평하던 아빠가 족발집을 지나가며 ‘동생이 없으니 족발을 먹을 일도 없네’라고 말했다. 나도 족발 환장하게 좋아하는데. 그리고 나는 내 방이 온통 축축해질 만큼 울었다.
우리 집 남자들이 나를 하대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내가 그들을 아는 만큼 나를 알아주는지는 잘 모르겠다. 과연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3개라도 댈 수 있을런지. 우리 가족에 한해서는 모르는 게 차라리 나은 구석이 있다. 그 사랑의 부조리함 때문에 나는 아직도 집안에서 툴툴거리는 딸이자 누나다.
그렇게 나를 특별하지 않은 딸이자 누나로 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누나와 딸과 엄마의 경계를 오가는 다중 인간이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어쩌면 이미 글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