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두통은 어디에서 왔을까

by 최열음

어제는 간만에 찾아온 아빠의 두통과 함께했다. 주기적으로 극심한 두통을 겪는 우리 아빠는 예민한 신경 때문인지 자주 앓아눕는다. 이 고약한 놈은 보통 일요일 낮에 찾아오는데, 그 정도에 따라 나와 동생의 주말 저녁이 달라진다.


안타깝지만 내게도 유전되었고,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는 날이면 어김없이 머리가 지끈거린다. 내가 기억하기 시작한 이래로 아빠는 일주일에 한 번씩 아팠고, 열도 나지 않는 두통은 속으로만 뒤지게 아픈 몹쓸 병이라 내가 도울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겉으로 티도 안 나면서 안으로 곪는 병은 비겁했다. 아빠가 앓아누우면 나는 그저 얼음팩을 몇 번 가져다주고, 물을 떠다 주고, 조용히 밥을 먹는 수밖에 없다.


어제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일찍 퇴근한 아빠는 쌕쌕 소리를 내며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아픈 숨소리는 통증이 꽤 심하다는 뜻이다. 나는 눈치를 보고 얼음팩을 하나 가져다주며 말했다. “오늘은 좀 심하네…”. 하지만 이런 류의 말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 대신 나는 조용하고 간단한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아빠가 아픈 건 내 탓이 아니지만 괜히 나 혼자 맛있는 밥을 먹는 게 미안하기도 하고, 맛있지 않더라도 식사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부당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식사를 거른 적은 하루도 없었지만.


여하튼 아빠가 깨면 하나라도 먹을까 하는 마음 30%, 전부터 내가 먹고 싶었던 마음 70%에 기반하여 얼려놨던 옥수수를 찌기 시작했다. 동시에 신라면 건면을 끓이며 평소 소리의 절반에도 못 미치게 드라마를 켜두었다. 한번 삶아서 얼려둔 옥수수는 제대로 보관하지 않으면 퍼석해지기 마련이다. 라면보다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은 옥수수였기에, 완성된 라면을 식탁에 두고도 옥수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면치기를 하면서 신명 나게 먹었을 테지만 어제는 모든 소리가 무음에 가까워야 했다. 눈치를 보며 먹는 라면은 퍼석한 옥수수보다 맛이 별로였다.

결국 아빠는 옥수수를 입에도 대지 못했고, 나는 무언가 잘못된 사람처럼 아빠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저녁 식사 이후에는 서로의 방에 잘 드나들지 않지만 어제는 예외였다. 아빠의 물이 마르지 않았는지 확인해야 했고, 금세 녹아 뜨거워진 얼음팩을 갈아두어야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아빠가 아플 거라는 통계적 경험으로 익숙해질 법도 한데, 나는 아빠와 관련된 일에 있어서는 쉽게 익숙해지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한때는 아빠가 두통을 겪어야만 하는 이유를 생각해보기도 했다. 아무리 예민한 사람일지언정 매주 두통을 겪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일 것이다. 가설을 제기해 보자면,


1. 고질병으로 뭉쳐 있는 어깨 근육

2. 엄마의 죽음으로 인한 일종의 PTSD

3. 무리한 조기 축구회 활동 (일요일 아침마다)

4. 이 모든 것의 총합과 예민한 성격


엄마가 있을 때부터 두통이 지속되었다면 2번은 제외일 것이다. 그러나 일요일이라는 시간은 우리 집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지난한 역사를 떠올려보면 일요일은 유일하게 가족들이 모두 쉬는 날이자 함께하는 날이었다. 엄마가 살아있는 동안은 모두 주 6일제로 일하던 시절이니까. 그러니 일요일은 공식적인 가족의 날이었다. 100%의 확률로 내향형일 아빠는, 아마 피곤하지만 엄마의 뜻을 따랐을 것이다. 두 분은 제대로 싸운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짐작해 본다. 물론 싸우지 않는 연애가 건강하다는 건 아니지만.


그러니 아빠는 그런 일요일을 몸으로 그리워하며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일요일 저녁에만 간신히 끼니를 함께하는 가족이 되었으니까.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교회에 있고 약속도 많은 나는, 일요일 저녁만이라도 아빠와 함께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많다. 승우가 군인이 된 지금, 우리 둘은 붙어있는 유일한 가족이 되어버렸고, 그렇기에 아빠의 두통을 더 나의 일처럼 느끼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의 예민한 성격까지 고대로 학습했다. 동생은 나와 다른 식으로 예민한 편이다. 우리의 예민함에는 각자의 고유한 경험과 성질이 깃들어있다.


아빠를 이해하기 위해 그가 예민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생각해 본다. 아마 어릴 때 아빠의 아빠가 돌아가시면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7살 때부터 1남 3녀 집안의 유일한 장남이자 가장으로 대우받으며 동시에 그만한 책임감을 짊어졌을 것이다. 하나 남은 소시지나 계란 후라이는 무조건 아빠의 것이었을 테다. 그러다 스무 살쯤 아빠의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심해졌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준비가 되었든 되지 않았든 세상으로 떠밀려 나갔을 것이다.

대학보다는 취업이 먼저였을 것이고, 꿈이었던 건축업이 생존 수단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야간 대학은 행운이었고, 1남 4녀 중 막내인 엄마를 만난 것은 묘한 이끌림이었을 것이다. 엄마도 하나 남은 계란말이를 먹는 장본인이었을 테지. 그렇게 한여름밤의 꿈처럼 엄마는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나와 동생과 텅 빈 거실만 남았다. 그에게는 잠깐 달콤하고 오랫동안 가혹한 세상이었을 것이다. 이제 나는 나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중이고, 아빠는 한 부분이 되고 말았다. 그는 나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열쇠이자 열고 싶지 않은 자물쇠이기도 하다.


그러니 나는 여기 서서 아빠의 얼음주머니를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그가 육체적으로나마 마음껏 아파하는 그때에, 곪아 터진 마음을 다 토해내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