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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너는 내 운명

불쑥 내 인생에 들어온 조력자.

by 행복한 요리사

요리 인생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웬 러브스토리인가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이 남자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는 뒷 이야기가 진행이 안되기에 한 챕터를 할당하고자 한다. 이 남자를 '현'으로 칭하겠다.

현이를 처음 만난 건 제주도. 치동오빠(CIA요리학교를 같이 다닌 오빠)가 하고 있는 파스타 가게였다. 가게 오픈 준비를 하던 치동오빠는 미국에서 같이 일했던 현이에게 도움을 청했고, 당시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일을 하며 '이 길이 내 길인가'하는 회의감이 있었던 현이는 머리도 식힐 겸 제주도에서 오빠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 나는 오빠 가게에 놀러 갔다가 현이를 만났고 현이는 처음 날 보는 순간 반했다고 한다. 하핫. (쑥스럽다)

현이는 나를 좀, 조금 많이, 많이 쫓아다녔다. 사실 나는 연하인 현이가 그다지 끌리지 않았고 동네꼬마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겪어보니 나보다 어리지만 훨씬 성숙하고 어른스럽구나 느끼면서 나도 모르게 스며들었다.

현이에게는 (시동이 자꾸 꺼지는) 당근에서 산 스쿠터가 있었다. 제주도에 와서 원하던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좌절스런 마음이 들었을 때 현이는 갑자기 스쿠터를 타고 나타나 뒷좌석에 나를 태우고 제주 바다를 누볐다. 누비는 도중 시동이 꺼지면 내려서 옆에 달린 스타터를 수동으로 밟아 시동을 다시 켜야 했다. 수시로 시동이 꺼지는 게 뭐가 그렇게 웃기다고 우리 둘은 시동이 꺼질 때마다 웃었다. 그 스쿠터가 싫기보다는 근검절약하는 현이의 생활이 오히려 좋았다.

하루는 팥빵 천 개를 만들어야 했다. 1000개. 말이 쉽지 천 개는 진짜 어마어마하다. 아마 사진첩 어딘가에 팥빵 천 개와 지칠 대로 지친 내가 같이 찍은 사진이 있을 것이다. 중간에 사장님이 자리를 비워서 거의 혼자서 빵을 만드느라 힘들었고 시간이 오래 걸렸다. 빵집 앞에 스쿠터를 대고 나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현이는 내가 나오질 않자 가게 안으로 들어왔고 새벽 4시까지 빵 천 개를 한 개 한 개 같이 포장했다. 그때 현이에게 얼마나 미안하고 고맙던지.

요리라는 공통 관심사가 있다 보니 함께 요리책을 보며 공부하고, 내가 만든 음식을 먹어보고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점도 좋았다. 가게 오픈 때부터 큰 사랑을 받아온 '프렌치 어니언 스프'도 현이가 미국에서 너무 좋아했던 음식이라고 해서 메뉴 테스트를 했고 훗날 가게 메뉴에도 넣게 되었다.

현이는 당시 해산물 포차를 하고 싶어 했다. 현이는 쉬는 날 슬리퍼를 신고 연습해 볼 광어를 한 마리 사려고 서귀포 올레시장에 갔다.

"광어 한 마리 주세요. 손질하지 말고 통째로 주세요."

시장 아주머니가 굉장히 이상한 눈빛으로,

"뭐 할라고요??" (상식적으로 손질 안된 광어 한 마리를 사가는 손님이 몇이나 되겠는가.)

"회 뜨는 거 집에서 연습하려고요."

"그러면 집에서 하지 말고, 돈 안 받을 테니까 여기서 잡아봐요."

엄청나게 당황스러웠지만 현이는 슬리퍼 신은 발에 물을 다 튀기며 손을 벌벌 떨며 그곳에서 생선을 잡은 이야기를 나에게 해주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현이는 그 가게에서 하루 몇십 마리의 생선을 잡으며 일하기 시작했다.

시장에서 일하면 호객행위도 필수이다. "어머님, 오늘 광어 좋습니다." "한 접시에 2만 원~"

시장에서 일하는 현이를 몰래 보며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이는 퇴근 후 나를 만나면 자랑을 했다. 오늘은 어제보다 생선 손질을 더 깔끔하게 했다는 둥, 처음에는 쑥스러웠는데 오늘은 내가 호객행위를 잘해서 몇 접시를 더 팔았다는 둥. 배우기 위해서는 안 해본 것도 시도해보아야 한다는 단단한 마음가짐, 피하지 않고 현실과 부딪혀보는 용감함 그리고 긍정적인 현이의 삶의 태도가 나를 물들였고 그런 현이의 장점들을 본받고 싶었다.

그때는 우리 둘 다 가진 것도 이룬 것도 하나 없었는데, 좋아하는 요리를 하고 공부하며 마냥 행복했다. 현이와 나는 조건이 아닌 '나라는 사람' '너라는 사람'에 이끌렸다. 현이는 내가 어려움에 처하면 갑자기 나타나서 도와주는 슈퍼맨 같은 조력자였고, 지금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동반자가 되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했던가. 내가 그 나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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