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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산톡톡 Jan 20. 2023

지하로부터의 수기

"나는 아픈 인간이다, 심술궂은 인간이다"

민족의 큰 명절 설을 앞두고,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읽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의 대 문호라고 불리지만 그의 '작품'을 실제로 완독한 사람은 많지 않다. 비교적 잘 알려진 작품인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도 실제로 책을 펼쳐 보면 난해하고 지루한 표현이 넘쳐난다. 나도 개인적으로 참으로 무의미한 시간이 넘쳐나는 군 병장 시절에 두 작품을 접했기에, 어찌 됐든 꾸역꾸역 읽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을 들여 곱씹으며 읽다 보면 나름의 방식으로 심리, 철학, 윤리, 종교적으로 당대의 문제들을 풀어내는 해학과 풍자가 느껴진다.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첫인상도 참으로 난해하다.  이 작품은 '지하'와 '진눈깨비에 관하여'라는 2개의 장으로 나뉜다. 

"나는 아픈 인간이다... 나는 심술궂은 인간이다"라는 주인공의 독백으로 시작되는 1장은, 한때 하급 관리로 일했으나 약간의 유산을 물려받은 이후 지하에 틀어박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주인공의 독백이 60페이지 가까이 이어진다. 그 글에서는 주인공의 과거의 경험에 대한 혐오와 모욕, 그리고 복수할 궁리가 끝없이 이어진다. 특별한 서시와 논리 없이 이어지는 감정의 향연이기에 난해하고 어렵다. 읽다 보면, 이게 뭐지? 혹시 원어로 읽으면 다르게 느껴지나? 정도의 생각이 든다.

2장 '진눈깨비에 관하여'에서는 그가 이십 대에 경험한 일들을 들려주는데, 주인공의 나약함과 찌질함이 돋보인다. 그는 자신보다 나은 이들을 질시하고, 부족한 이들을 모욕하며, 때로는 지배하려 든다. 하지만 복수, 모욕, 지배를 목적으로 그가 꾸미는 다양한 '음모'들은 머릿속을 맴돌 뿐이다. 이따금 실제로 이뤄지는 경우도, 워낙 현실감각이 부족한 주인공의 '무능'에 힘입어 엉뚱한 결과로 이어지곤 한다. 결국 소설 말미에서는 그가 매춘부에게 행한 작은 동정조차 무시당하는 상황에 이르는데... 독자인 나조차 애처롭게 느껴질 정도이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지하에 침잠한 무기력한 지식인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자신의 상황을 곡해하고, 본인의 망상에만 끊임없이 몰입하다가, 결국은 악에 받쳐 엉뚱한 결론에 도달해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는 그 상황에 대해 어떠한 불만도 없으며, 그것을 즐기기까지 한다.  

학생 시절 이 작품을 읽었다면, 외부와 단절된 인간에 대한 '실존적 성찰'이 돋보이는 작품이다...라고 리포트를 썼겠지만, 지금은 그저 "사람은 가끔 외출도 하고 대화도 해야 한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민음사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200페이지에 못 미치는 분량이지만, 빽빽한 활자와 어둡고도 긴 문장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마저 2장에서는 주인공의 끝없는 자격지심과 기행을 바라볼 수 있으니 상황이 나은 편이다. 어쨌든 현대인에게는 참으로 난해하고 고약한 소설이다.

그럼에도 스스로에게 침잠된 존재가 내뱉는 무한한 '독백', 그리고 도스토옙스키에게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읽을 만한 책!

#독서노트 #지하로부터의수기 #도스토옙스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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