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카페 사장이다. 아르바이트생 한 명을 뽑아야 하는데 A와 B 두 명의 지원자가 왔다. 둘의 수행능력이 비슷한데 A가 B보다 잘생겼다면 누구를 뽑겠는가. 당연히 A를 뽑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회사에서 개발자 한 명을 뽑는데 지원자 두 명의 개발 실력이 비슷하다면 더 건강한 사람을 뽑을 것이다. 나는 이런 현실적인 부분을 인정했기에 탁월해지기 위해 더욱 노력했었다. 내가 다가오는 팀프로젝트를 설레하고 기대했던 것은 내 프로젝트 팀원도 건강문제를 앓고 있던 만큼 삶을 대하는 태도가 나와 비슷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는 내 착각이었다. 나의 프로젝트 팀원은 나와 정반대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내 사상이 '남들보다 건강하지 못한 만큼 더 열심히 하자!'라면 내 팀원은 '남들보다 건강하지 못한 만큼 더 편하게 하자!'였다. 이런 삶의 태도는 코딩에도 고스란히 나타났다. 팀프로젝트 매 순간순간이 갈등과 설득의 연속이었다. 난 어렵더라도 완벽한 결과물을 추구했고, 팀원은 쉽게 할 수 있는 적당히 완성된 결과물을 추구했다. 연애에서도 더 사랑하는 쪽이 을이 되듯이 내 프로젝트도 욕심이 더 많았던 내가 을이 됐다. 팀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 멘토님이 '팀프로젝트는 여럿이 모여 1의 결과라도 낸다면 잘한 것'라고 하셨었는데 직접 팀프로젝트를 경험해 보니 그보다 정확한 말도 없었다. 팀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나는 스트레스 국물에 익어가는 샤부샤부 고기가 된 것 같았다.
서울에서도 왼쪽 발바닥 사마귀 냉동 치료는 3주마다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팀프로젝트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고 해서 내 몸이 나의 사정을 봐주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장난꾸러기가 됐다. 한 번은 새벽에 일어나 소변을 보는데 혈뇨와 함께 요도로 가시구슬이 나오는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와 더불어 오른쪽 옆구리에는 무하마드 알리에게 카운터 훅을 제대로 한 대 맞은 것 같은 통증도 느껴졌다. 나는 헉 소리를 내며 변기 앞에서 그대로 주저앉았다. 처음 겪어보는 사람이라면 당황했겠지만 나는 이미 한번 겪어봤던 증상이기에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바로 요로결석이었다. 처음으로 이런 증상을 겪었을 때 주치의 선생님께 말씀드리니 의사 선생님은 내 증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원래 크론병 환자는 요로결석 위험이 높으니 물을 많이 마시라는 말씀뿐이었다. 나는 옆구리를 움켜쥐고 응급실을 갈지 말지 고민하며 생수를 벌컥벌컥 마셔댔다. 다행히 한 시간쯤 뒤에 소변을 보니 통증이 사라졌다. 나는 안도하며 다음날 개발 일정을 위해 잠에 들었다.
팀프로젝트 막바지였던 2023년 3월 중순쯤 오른쪽 엄지발가락 관절이 부으며 아프기 시작했다. 자다가 솜처럼 부드러운 이불에 엄지발가락이 스치기만 해도 바늘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지겠지 싶어 참았으나 2주가 지나도 그대로였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니 통풍이었다. 나이가 많은 것도, 술을 마시는 것도, 물을 적게 마시는 것도, 비만도 아니었는데 통풍이라는 결과가 나오자 의사 선생님도 의아해했다. 당시 나는 식사 후 30분간 하는 산책이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처였기에 왼발바닥 사마귀 냉동 치료를 하는 중에도 왼발을 쩔뚝거리며 꿋꿋이 산책을 했었다. 하늘은 왼발을 쩔뚝이면서까지 산책을 하는 나를 짓밟고 싶었는지 하필 오른발에 통풍을 선사했다. 양발에 통증이 생기자 도저히 산책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마치 터미네이터 모델명 같은 T100 인간이 아닌가. 나는 하늘에 엿을 날리며 다사다난한 프로젝트로 바쁜 와중에도 통풍 문제 해결을 위해 짬을 내어 통풍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그 결과 무리한 단백질 섭취, 당이 많은 음료, 퓨린이 들어간 음식이 통풍을 유발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사실을 알고 나니 내 식단의 세 가지 문제점이 보였다.
첫 번째 문제는 내 몸무게에 비해 너무 많은 단백질을 먹고 있다는 것이었다. 서울에 올라와 공부를 하며 내 몸무게는 어느새 54kg까지 빠져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나는 66kg의 체중으로 운동을 하고 있다는 가정하에 단백질을 섭취하고 있었다. 그 시절로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나도 모르게 계속 그 시절의 몸 상태를 기준으로 식사를 했던 것이다. 나는 현실을 받아들이며 단백질 섭취량을 현재 내 몸무게 숫자에 g을 붙인 양으로 줄였다.
두 번째 문제는 내가 아침식사 대신 먹던 크론병 환자 전용 경장식이었던 모노웰이 생각보다 많은 양의 설탕이 들어간 제품이라는 것이었다. 모노웰 제조사는 피크닉에 식초를 탄 맛이라는 끔찍함을 설탕으로 해결한 것 같았다. 당시 난 모노웰을 아침대신 두 번, 점심과 저녁사이 간식으로 한번, 하루에 총 세 번씩 마셨는데 한번 마실 때마다 500ml를 마셨으니 하루에 콜라처럼 달달한 음료수를 1.5L씩 먹은 셈이었다. 바로 모노웰을 중단하고 3끼 식사 모두를 일반식으로 바꿨다.
마지막 문제는 당시 나는 일주일에 엄마 반찬을 두 번씩 받으며 3일 내내 또는 4일 내내 같은 음식을 먹고 있었는데 이런 과정에서 시금치 같이 퓨린이 많이 함유된 음식을 나도 모르게 단기간에 많이 섭취했다는 것이었다. 특히 고등어, 시금치, 콩, 버섯 같이 퓨린이 많이 들어간 음식이 한꺼번에 반찬으로 오면 그야말로 퓨린 영양제를 몸에 쑤셔 박은 셈이었다. 당장 엄마에게 이 사실을 알리며 당분간 퓨린이 많이 함유된 반찬은 피하기로 했다.
식단을 개선하자 오른발 통증이 서서히 좋아지기 시작했다. 아는 것이 힘이라더니 역시 공부하면 해결하지 못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하늘은 내가 어떤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는지 테스트해보고 싶었던 건지 내게 또 다른 문제를 바로 던져줬다.
내게 생긴 새로운 문제는 바로 변비였다. 변비는 훈련소에 막 입소한 군인들, 다이어트를 시작한 여자들 등 일반인들도 많이 겪는 흔한 질환이라 듣는 사람은 변비의 심각성을 못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크론병 환자의 변비는 일반인들의 변비와는 살짝 결이 다르다. 크론병은 소화기관 전체에 염증이 나는 병으로 특히 소장, 대장, 항문에 염증이 많이 생긴다. 이런 염증들을 적절한 약을 사용하며 치료한다. 문제는 크론병은 현재 완치가 안 되는 난치병이라는 것이다. 크론병 환자의 소장, 대장, 항문은 염증이 늘어나는 활동기와 염증이 줄어드는 관해기를 장기간 반복하며 서서히 좁아진다.
물리적으로 장이 좁아지니 음식물 이동이 느려지고, 음식물 이동이 느려지니 소화가 느려지고, 소화가 느려지니 변이 몸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다. 그렇게 딱딱해진 변이 장 중간에서 막히면 장폐색이 되고 좁아진 항문 앞에서 막히면 변비가 된다. 2013년 크론병을 처음 확진받으며 설사만 주구장창 했던 나는 2021년 11월 휴미라 주사제를 맞으면서 변비가 시작됐다. 장에 있던 염증이 한순간에 좋아짐과 동시에 좁아진 것이 원인이었다. 한참을 변비로 고생하다 아침을 모노웰로 대신하며 2식을 먹게 된 이후로 변비증상이 좋아졌었는데 통풍문제로 다시 3식을 시작하자 명절에 고속도로가 막히듯 변비가 시작된 것이었다.
변비의 고통은 음식물이 장을 지날 때부터 시작된다. 나의 변은 배꼽 왼쪽 밑에 있는 L자 커브를 지날 때마다 내게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겠다는 듯 신호를 보냈다. 나는 헉 소리가 절로 나는 쥐어짜는 통증과 함께 나의 변이 해당 커브 코스를 무사히 지날 수 있도록 변을 밀어내는 장 마사지를 해줬다. 우여곡절 끝에 밀어낸 변이 직장에 어느 정도 모이면 그들은 내게 변의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화장실에 가서 그들의 출가를 위해 힘을 빡 주지만 나오지 않았다. 새끼손톱만 한 구멍 바로 뒤에 사과가 있는 느낌이었다.
다행히 1시간 정도 눈앞이 까매지도록 힘을 주자 항문이 찢어지는 통증과 함께 변들이 세상의 빛을 보며 변기물로 다이빙할 수 있었다. 항문 통증으로 도저히 앉을 수가 없었지만 어떻게든 팀프로젝트 일정을 소화해야 했기에 서거나 누워서 코딩을 했다. 그 결과 성공적으로 팀프로젝트를 완수했다. 칭찬에 인색하셨던 부트캠프 대표님은 8주라는 기간을 고려하더라도 훌륭한 결과물이었다고 칭찬해 주셨다.
팀프로젝트가 끝나고 곧바로 개인프로젝트가 시작됐다. 개인 프로젝트기간 동안 나의 목표는 두 가지였다. 탁월한 개인프로젝트 결과물 만들기 그리고 식단 개선을 통해 변비 고치기였다. 틈만 나면 유튜브 쇼츠를 보는 대 쇼츠 시대에 나는 틈만 나면 식단 공부를 했다. 통풍과 요로결석, 변비와 크론병 악화를 모두 피할 수 있는 식단을 찾기 위해 공부하다 보니 시간이 부족해져 그렇게 좋아하던 웹툰마저 모두 끊었다.
그래도 변비 증상은 그대로였다. 오히려 나에게 대놓고 엿을 먹이는 것마냥 악화됐다. 한창 개인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던 4월의 어느 아침 화장실에 갔다가 또 막힌 느낌이 났다. 이번엔 새끼손톱만 한 구멍 바로 뒤에 수박이 있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힘을 줘도 항문이 찢어지며 피가 줄줄 흐르기만 할 뿐 나올 기미가 안보였다. 이미 직장부터 항문 입구까지 변이 가득 차있어서 그만둘 수도 없었다. 변이 괄약근에 걸쳐 있어서 그런지 변의가 계속 느껴지며 소름이 돋고 온몸에 힘이 빠졌다. 전신에 식은땀이 홍수처럼 흘렀다. 진퇴양난이었다.
1시간을 넘게 힘을 줘도 방도가 없자 나는 가까운 약국에 피똥물을 뚝뚝 흘리며 엉거주춤 걸어가서 관장약을 사 왔다. 인간의 존엄성 이런 건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화장실 바닥에 옆으로 누워 관장약을 넣기 위해 별짓을 다했는데 항문이 변으로 꽉 막혀있어서 들어가질 않았다. 크론병카페를 찾아보니 이런 상태에서 병원에 가면 직접 손으로 파내는 수지관장을 해준다고 했다. 수지관장도 문제였지만 이 상태로 택시를 타는 것도 아찔했다. 어떻게든 혼자 해결하기 위해 나를 낳았던 엄마를 상상하며 세면대를 부여잡고 재래식 화장실에서 변을 보는 자세로 힘을 줬다. 눈앞이 깜깜해지고 정신이 혼미해질 만큼 힘을 주니 괄약근이 찢어지는 통증과 함께 수박이 쏟아지는 느낌이 났다. 항문도 성감대가 될 만큼 예민하다더니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통증이었다. 하반신은 피와 변으로 뒤범벅되고 얼굴은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항문은 입술처럼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5일 뒤에 위와 똑같은 경험을 한번 더 했다. 차이점은 아직 항문의 상처가 아물기 전이었다는 것뿐이었다. 힘을 주다가 문득 '그냥 창문에서 떨어져 죽자'는 생각이 들었다. 코딩하기도 바쁜 마당에 다음날 똥 싸는 걸 두려워해야 하는 삶이라니, 신과 함께에서 봤던 지옥들 중에도 이런 지옥은 없었다. 하지만 내가 떨어져 죽은 뒤에 '삼성역 앞 오피스텔에서 배변 중 투신 자살한 남성'이라는 기사가 나갈 것을 상상하자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죽음을 슬퍼할 엄마와 여자친구의 모습도 떠올랐다. 나는 비밀 요원이 비장한 각오로 은퇴 미션을 수행하는 것처럼 이번 변만 보고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각오를 하며 어떻게든 힘을 줬다. 3시간 정도 힘을 주니 이번에도 결국 지옥 같은 배변을 성공할 수 있었다. 고작 모닝똥 하나에 신체 에너지와 정신 에너지를 모두 털린 나는 대표님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본가로 내려가서 열흘정도 휴식을 했다.
집에서 휴식을 하고 돌아왔다고 해서 변비가 좋아진 건 아니었다. 변비 박사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공부하고 노력하고 식단을 개선했는데도 효과가 전혀 없자 화가 났다. 식단 관리 따위 개나 주자라는 마음으로 집 앞에 있던 백화점 식품관에 갔다. 그런데 식단 공부를 너무 해서 인지 음식을 볼 때마다 몸에 좋지 않은 이유들이 드래곤볼 전투력 측정기를 낀 것처럼 음식 옆에 자동으로 나열됐다. 하나하나 따지고 보니 도대체가 몸에 좋은 음식이 하나도 없었다.
그 순간 음식들이 눈앞에서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했다. 어지럽고 숨쉬기가 힘들었다. 토가 나올 것 같았다. 계속 여기 있으면 잘못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어 식은땀을 흘려가며 겨우 백화점을 빠져나왔다. 나중에서야 이게 공황장애 증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밖에서 심호흡을 하며 안정을 찾았다. 그냥 아무거나 단 음식이 먹고 싶어 집 앞 빵집에 가서 단팥빵을 사 먹었다. 1년 6개월 만에 먹는 단팥빵은 너무나 달콤하고 자극적이었다. 그렇게 절제하던 식단이 무너지며 매일 빵을 먹게 됐다.
빵돌이로 타락해 버린 나는 2023년 6월 11일 일요일 처음 코로나에 걸렸다. 어떻게든 코로나를 피하기 위해 몇 년간 외식을 아예 끊고 친구들도 안 만나며 밖에서는 한 번도 마스크를 벗은 적 없었는데 말이다. 열이 40도까지 올라갔는데 일요일이라 연 병원이 없어서 삼성병원 응급실에 갔다. 당시 일반인들에겐 코로나는 독감정도로 취급됐었지만 난 기저질환자였기에 삼성병원 음압실에 격리됐다. 피검사를 해보니 몇 년 동안 힘들게 관리해 왔던 염증수치가 한순간에 높아져있었다. 염증수치를 낮추기 위해 별짓을 다했었는데 코로나 하나로 무용지물이 됐다니 허탈했다.
코로나 때문에 기침을 많이 하니 오른쪽 어깨가 아팠다. 2014년쯤에 어깨충돌 증후군으로 왼쪽 어깨를 수술한 적이 있었는데 비슷한 느낌의 통증이었다. 기침을 하며 뼈에 인대가 계속 긁히며 상처가 나고 염증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어깨가 아파지니 청소와 설거지 등 집안일을 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난 과거에 결벽증이 있었던 만큼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방구석이 개판이 됐다. 지저분한 집안을 보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였다.
어깨 통증으로는 부족했는지 두피를 중심으로 수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병변 부위가 하루 종일 간지럽고 따가웠다. 병원에 가보니 기존에 앓고 있던 면역질환과 코로나의 콜라보로 내 면역체계에 이상이 생긴 것 같다며 스테로이드 연고를 처방해 줬다. 연고를 바르면 잠깐 호전됐다가 다시 악화되기의 반복이었다. 두피, 코, 이마, 귀, 배, 옆구리 점점 전신으로 번져갔다. 이중 가장 고통스러운 곳은 귓 속이었다. 귓속에 염증이 생기자 하루종일 화끈거리며 내 심장 박동이 크게 느껴졌다.
이 와중에도 왼쪽 발바닥 사마귀 치료는 계속 이어졌다. 아주 지독하게 근면성실한 놈이었다. 뭐라도 자극적인 것이 먹고 싶어 배달음식을 시켜 먹었다. 다 먹고 나면 후식으로 디저트도 시켜 먹었다. 그래도 계속 허기지고 공허하고 우울해서 과식을 하고 폭식을 했다.
매일매일이 전쟁이고 지옥이었다. 부트 캠프 과정은 중단된 지 오래였다. 다음날 아침이 오는 게 무서워서 잠들 때마다 이대로 깨지 않기를 바랐다. 깨어있을 땐 자극적인 음식, 게임, 유튜브, 웹툰이 전부였다. 몸무게는 48kg까지 빠졌다. 거울을 보니 피부는 푸석하고 염증이 가득하고 입술은 메말라있었다. 누가 봐도 아파 보이는 얼굴이었다.
결국 혼자서는 이 문제들을 극복할 수 없다고 판단한 나는 2023년 8월 모든 것을 그만두고 본가로 내려갔다. 젊은 크론병 환자의 인생 첫 자취는 이렇게 1년 만에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