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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아레테 Feb 09. 2022

내가 사랑하는 순간들

당분간은 누리기 힘들기에, 그래서 더 애틋하고 소중한


출산예정일이 2주 앞으로 다가오게 되면서 밤잠이 더욱 짧아졌다. 원래 아침형 인간이라 잠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짧게는 새벽 3시부터 일어나는 경우가 생기다 보니 수면의 질이 많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두 시간마다 깨는 신생아를 위해 몸이 호르몬을 분비하면서 적응기를 가지는 거라는데, 신체의 변화란 놀라우면서도 벌써부터 아기 키우는 데 전념하라며 윽박지르는 것 같아 쓴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이젠 나도 개개인으로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를 양육하고 교육해야 할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거듭나는 것이니까.


출산을 하게 되는 순간부터 인생이 뒤바뀐다고 한다. 아마 나의 자아 중심으로 정립되었던 나의 세계는 철저하게 부서지고, 아이를 중심으로 재조립될 것이다. 그리고 그 재조립 과정은 너무 치열하고 아파서 나를 분노하고 힘들게 하겠지만, 그래도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해 줄 것이라는 긍정적 믿음은 가져가기로 했다. 출산을 앞두게 되면서 어깨에 얹어진 책임감으로 잠시 느슨해졌던 삶의 '치열함'을 다시 깨닫고 있으니까. 일례로 요새 나는 블로그를 열심히 하고 있다. 휴직 기간 동안 기저귀 값이라도 벌어보자는 의미에서 시작한 건데, 직장에 다닌이후로 오랫동안 무언가를 해본 게 오랜만인지라 나 스스로가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여하튼, 이미 나의 일과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을) '아이'를 위해 서서히 변화하고 있었다.


그와 별개로 오늘은 다른 순간을 기록하고 싶다.


아이를 낳기 전, 싱글이었던 나 자신이 사랑했던 순간들.

신혼생활을 하면서 임신기간을 견뎌내는 동안 사랑할 수밖에 없던 순간들을 말이다.





01.


나는 남편과 우리 댕댕이가 모두 잠을 자고 있는 새벽이 좋았다. 특히 겨울은 해가 늦게 뜨다 보니 조금 늦장을 부리더라도, 아침해가 어스름하게 걸쳐져 있는 새벽녘을 맛볼 수 있어 기분이 좋다. 고요함과 적막함 속에 간간히 섞여 들리는 남편의 코 고는 소리와 댕댕이의 숨소리는 묘하게 어울리며 밤의 침묵과 섞여있었다. 가끔 나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침대에 말똥히 누워서 그 침묵을 종종 즐기곤 하였다. 아무 생각 없이 밤의 침묵에 녹아내릴 수 있는 온전한 나의 시간. 발밑에서 잠을 자던 댕댕이가 가끔 내 뒤치닥거림에 깨면, 내가 이미 일어난 줄 알고 내 머리맡으로 천천히 걸어온다. 작은 발바닥이 매트리스를 스치며 걸어오는 소리, 그리고 '끄응~'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내 얼굴에 엉덩이를 바짝 붙이고는 몸을 둥글게 움트는 아이를 보면 정말 사랑스럽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뜨끈뜨끈한 몸을 어루만지면서 토닥이다 보면 나도 다시 잠이 든다. 아마 아이가 태어나면 이런 새벽녘의 고요함은 당분간 즐기기는 힘들 것이다.



02.


일주일에 이틀, 친정엄마와 동생이 우리 집에 놀러 온다. 우리 집의 사랑받는 귀염둥이 댕댕이를 본가에 데려가기 위함이다. 우리 둘 다 맞벌이다 보니 댕댕이가 집에서 혼자 외롭지 않게 주 2~3회 유치원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주중의 남은 이틀은 본가의 집에 보내서 하룻밤 재운다. 우리 막둥이를 너무 사랑하는 엄마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엄마는 학창 시절 키웠던 강아지를 보낸 이후로 오랜 시간 동안 강아지를 키우지 못했는데, 먼저 떠나간 아이 대신 보상이라도 하듯 엄청난 사랑과 애정을 퍼붓고 있는 중이다. 마치 방학마다 손자를 할머니 댁에 보내듯이, 우리 댕댕이는 일주일에 한 번 할머니 집으로 놀러 가서 간식도 실컷 먹고, 이모와 신나게 놀다 와 하이텐션으로 집에 귀가한다. 어쨌건, 임신과 재택근무를 하게 되면서 엄마와 동생이 오는 날에는 일주일 동안 밀린 소회를 나누며 같이 점심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음식 만드는 솜씨가 좋은 동생이 만든 요리를 먹기도 했고, 때로는 내쪽에서 골뱅이 소면이나 스파게티 같은 비교적 간편한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기도 했다. 결혼한 이후로 서로 바쁘다고 근황을 나눌 일이 많지 않았는데, 오히려 임신기간 동안 더 돈독해졌다.




나는 이 순간이 좋았다. 따뜻한 햇살이 쏟아지는 어느 오후, 엄마랑 동생이랑 거실에 상을 펴고 앉아서 도란도란 음식을 나눠먹는 순간을 말이다. 학창 시절은 공부하느라, 대학교 때는 과외와 취업 준비하느라, 회사 다닐 때는 회사에 다니느라 이렇게 온전히 내 하루의 일부를 가족들과 써본 적이 없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아이를 낳고 나면, 그리고 복직을 하고 나면 또 여느 때처럼 바빠지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선물 같은 시간이 주어져 너무 행복하다.



03.



아이가 태어나기 이전에 댕댕이와 온전한 시간을 갖기 위해 펫 전용 리조트로 가족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우리는 주로 집에서 가까운 홍천의 '소노펫'을 이용했는데, 강아지 운동장이 있어 신나게 뛰어놀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 자연을 벗 삼아 산책을 할 수 있는 등산 코스도 있고, 야외 바베큐장에서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는 공간까지 마련되어 있어 사람과의 접촉을 최소화하면서 동시에 야외활동을 즐길 수 있었다. 물론 우리 댕댕이는 강아지 운동장에서 놀다가도 우리 주변을 맴돌기도 했지만, 적어도 아이가 없이 세 식구라는 이름으로 뭉칠 수 있는 시간을 온전히 누리면서 평화로움을 만끽했다. 이제 아이가 태어나면 당분간은 많이 신경을 쓰지 못할 것 같아 더 미안하기에, 적어도 우리 댕댕이의 견생에서 이 여행이 행복한 추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04.


임신기간을 견디면서 늦잠이 많이 늘었다. 태아검진휴가를 사용하거나 주말에 늦잠을 잘 때, 나보다 항상 늦게 일어나는 남편이 나보다 먼저 깨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나랑 댕댕이가 같이 자고 있으면 남편은 나를 깨우기보다는 얼굴에 항상 뽀뽀를 해주고 더 자라고 토닥인다. 남편이 뽀뽀하는 순간부터 잠에서 깨는 경우도 있지만, 그 순간을 굳이 깨고 싶지 않아 눈을 감고 남편의 손길을 가만히 받아들인다. 나를 토닥이면 우리 댕댕이에게도 똑같이 잘 잤냐며 아침인사를 건네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침마다 우리가 뽀뽀를 퍼부어댈 때마다 우리 댕댕이도 이런 기분을 느낄까? 참 사소한 것임에도, 기분 좋게 아침을 시작하는 남편의 뽀뽀는 하루를 더 즐겁게 시작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임신을 하면서 호르몬 탓인지 성격이 예민해져서 남편에게 종종 서러움을 토할 때가 있었다. 우리는 결혼 후에도 그렇게 많이 싸우진 않았는데, 적어도 싸움의 원인에 대해 합리적으로 해결책을 찾으려는 내 성향과 웬만하면 남의 의견에 맞춰주며 좋게 좋게 넘어가자는 남편의 성향이 같이 콜라보된 까닭이기도 했다. 일례로 강아지를 키우게 되면서 집에서 소위 '개 냄새'가 나지 않기 위해 청결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는데, 청소 횟수에 대해서는 서로 이견이 있었다. 나는 일주일에 최소 두 번은 청소와 스팀 걸레질까지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회사를 다니면서 평일 중간에 한 시간씩 청소에 힘을 쏟는 건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특히 임신을 한 이후로 몸이 힘들어지니 평일 청소는 유야무야 되어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결국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로봇청소기를 들여옴으로써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 (정말 로봇청소기는 혁명 그 자체다.)


대부분 집안일에 대한 부부싸움은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로 귀결된다. 결국 이에 대한 다툼은 일정 부분 자동화로 해야 하는데, 결국 자본을 투여해서 서로의 정신건강을 지킬 것인지, 아니면 아날로그적으로 몸을 쓰더라도 해결할 것인지를 빨리 판단할 필요가 있다. 한 번은 옷을 거는 방식으로 서로 의견 차이가 난 적이 있었다. 남편은 자주 입는 옷들(점퍼나 아우터)를 굳이 옷장에 거는 걸 매우 귀찮아했다. 주로 빨리 꺼낼 수 있게 의자 등받이에 걸쳐두는 걸 선호했는데, 나는 반드시 옷걸이에 걸어 (내 눈에 보이지 않게) 옷장에 넣는 걸 선호하다 보니 이 부분으로 계속 부딪혔다. 결국 타협책으로 3만 원이라는 자본을 투자해서 밖에 세워두는 옷걸이를 따로 사서 세워두는 것으로 합의했다. 의자나 소파 위에 지저분하게 널려있는 게 눈에 거슬리니, 차라리 하나로 모아서 걸어두는 게 그나마 맘이 편했다.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지만, 서로가 어느 정도 컨센서스를 이뤘다는 점에서 적절한 해결책이었다.


이렇게 어느 정도 남편과 의견 다툼 후에 서로가 그나마 50% 씩 양보하며 만족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아내는 그 순간도 묘하게 나한테 편안함을 준다. 갈등은 필연적이지만, 그 갈등을 해결하고 나면 더 이상 문제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아는 이런 부분에서 내게 새로운 난관을 제시할 것이다. 아이의 생떼는 '자본'을 투여한 '자동화'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교육방식에 대한 이념 차이는 삶의 가치관에 대한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그리고 해결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ongoing 될 확률도 높다. 하루에 열몇 시간씩 울어대는 신생아의 반복적인 울음을 누가 멈출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갈등이 복잡하고 다면화된 양상을 띄면서 반드시 해결책을 내려는 내 성향도 조금은 변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내 절친한 친구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해) 타협하고 포기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고 한다. 그러려니, 하며 이해하는 자세를 배운다는 것이다. 나처럼 통제적 성향이 강한 친구 입에서 그런 얘기가 나오니, 한편으로 궁금하기도 하다.


내 삶과 나의 가치관은 또 어떻게 변하게 될 것인가.

그리고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통제 불가능한 순간조차도 사랑하게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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