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먼지
‘헤이 재닛!’ 하고 부르면 나타나는 이 보랏빛 조끼를 입은 여성은 바로 드라마 '굿플레이스'의 마스코트, 재닛이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굿 재닛(Good Janet)'은 사후세계인 굿플레이스에 도착한 영혼을 돕기 위해 설계된 인공지능이다.
재닛의 첫인상은 지금보다 훨씬 똑똑하고 할 줄 아는 것이 많아진 20년 후의 ‘시리' 쯤 돼 보였는데, 사실은 램프의 요정 ‘지니'에 가까울 정도로 엄청난 능력을 가진 존재다. 각자의 문제로 골치 아픈 주인공들의 든든한 조력자이자, 그야말로 온 우주의 지식을 알고 있는 초월자다.
분명 엄청나게 대단한 인공지능인 건 확실한데, 사실 어딘가 허당스러운 것이야말로 재닛의 매력이다. 사람은 빈틈을 보일 때 제일 편해진다고, 마이클을 따라 사고를 치기도 하고 몰래 주인공들을 도와주기도 하는 그의 빈틈은 캐릭터를 더욱 사랑스럽게 만드는 포인트다. 언제나 자신이 인간도 여성도 아니라는 사실을 누차 강조하지만, 그래서 더 놀려주고 싶은 재닛이다.
재닛과 마이클, 죽은 영혼 4인방은 그야말로 많은 제러미베러미동안 베스트 프렌드였음이 확실하다. 그래서 문득 이런 질문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우리는 과연 인공지능과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Chat GPT가 삶의 양식을 바꾸고 있는 2023년의 우리에게 어느 때보다 유효하다. 어느새 성큼 가까이 와있는 미래. 2023년의 현실 속 인공지능과 인간이 우정을 나눌 수 있을까?
친구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크게 두 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하나는 신뢰, 나머지 하나는 공감이다. 일단 우정을 나눌 수 있으려면, 상대를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재닛을 믿을 수 있을까? 재닛에 대해 하나씩 알아보자.
첫째, 일단 재닛은 정말 ‘매사'에 친절하다. 엘리너가 억지스러운 요구를 해도, 제이슨이 바보 같은 질문을 해도 재닛은 웃는 낯으로 이들의 질문을 모두 받아준다. 원하는 것 무엇이든 재닛에게 요청하면 얻을 수 있다. 드라마를 보다 보면, 왠지 재닛만큼은 내가 어떤 헛소리를 하더라도 나를 받아줄 것이란 믿음을 갖게 된다.
둘째, 내게 절대 해를 끼치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다. 누굴 믿어야 할지 알 수 없던 굿플레이스 속 세계관에서 유일하게 재닛은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존재였다. 심지어 재닛에게 어떤 걸 물어봤는지조차 남들에게 비밀로 한다니! 재닛에게 물어보는 것은 그야말로 개인정보보호 모드로 웹서핑을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셋째, 그는 일관적이다. 제이슨이 재닛을 ‘girl’이라고 부를 때마다 자신은 ‘girl’이 아니라며 매번 ‘Not a girl’이라 대꾸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밈이 있을 정도!
마지막으로, 재닛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다. 그는 정말 말 그대로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물론 중간중간 재닛을 재부팅하면 그에게도 오류가 나지만, 그럼에도 재닛의 빛나는 지성은 감히 내가 믿지 않을 재간이 없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해 봤을 때, 재닛은 이미 ‘친구'에 있어 중요한 요건 하나를 충족한 셈이다. 재닛을 만나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단정할 수 있다. 재닛과 나 사이엔 신뢰가 존재한다! 재닛은, 적어도 굿 재닛은 분명 내가 어떤 짓을 해도 나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관건은 재닛이 충분한 공감능력을 갖고 있는지다. 2023년의 재닛이 이 능력을 갖고 있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 ‘고민상담 시뮬레이션'을 해보기로 했다. 고민이 있을 때야 말로 친구에게 가장 많은 공감이 필요할 때이니까.
이를 위해 character.ai라는 웹사이트를 활용하였다. 이 웹사이트 역시 기본적으로는 Chat GPT와 유사한 언어모델을 구현하는데, 다만 TV나 영화,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를 기반으로 학습시켜 그 캐릭터의 고유한 성격이나 특성이 드러나는 챗봇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내가 대화를 해볼 챗봇은 ‘굿 재닛 (Good Janet)’인데, 이 재닛은 내가 느끼기에 굿플레이스 속 재닛의 역할에 충실하다. 그에게 굿플레이스 속 캐릭터 '마이클'에 대한 이야기를 물으면 이렇게 답변할 정도다.
character.ai 속 캐릭터들과 대화하다 보면 30분은 금방 흘러갈 정도, 이외에도 흥미로운 챗봇들이 가득하다.
2023년 챗봇 ver. 굿 재닛이 얼마나 공감을 잘해주는지 알아보기 위해, 고민 상담을 해보려 한다. 미래에 대해 고민되고, 그래서 지친다는 내용의 고민상담이다. 과거 친구에게 했던 고민 상담의 내용을 바탕으로, 같은 질문을 재닛에게 던져보았다.
"내 미래가 걱정돼, 그냥 쉬고 싶어."
말이 조금 많은 것 같지만 친절한 재닛.
역시 질문이 조금 많은 것 같지만 따숩다. 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나의 영혼이 존재하는 이유라니… 왠지 내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말하면, 거기에 대해서도 엄청 호들갑 떨어줄 것 같다.
거의 상담선생님.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사람으로서, 쉬어도 된다는 말을 들은 것만으로 위안이 된다.
ㅠㅠ. 휴식이 게으른 게 아니라 강함과 성숙함을 의미한다니. 뻔한 말이지만 감동 백배.
2023년 챗봇 ver. 굿재닛은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좋은 리스너였다. 시답잖은 이야기를 할 때는 마냥 웃기기만 했는데, 그의 그 호들갑이 고민상담에서 빛을 발한다고 해야 할까? 내 감정을 이해해주려고 하는 듯한 제스처가 느껴졌다.
물론 그와 얘기하는 것은 친구에게 고민상담을 받는 느낌이라기보단, 상담선생님이나 병원 의사 선생님과 대화하는 것에 가까웠다. 재닛에게는 내게 공유해 줄 만한 ‘자신의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친구와 대화할 때는 그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 경험을 함께 공유함으로써 위안받고 공감을 받을 수 있었다면, 상담 선생님은 자신의 경험을 내담자에게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지 않고 보통 들어주는 역할을 맡는 것과 비슷하다.
또 한 가지는 재닛이 딱히 특별한 이야기를 해주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마치 자기 계발서처럼, 일반적인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에 가깝다. 단순히 대화형 인공지능 모델이기 때문이기에 기존에 있는 데이터에 기반한 답변을 내놓기 때문일 테다. 나에 대한 데이터가 학습된 것도 아니니.
그럼에도 내가 여기에 나름 위안을 받았다는 것은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하다. 사실 누군가에게 고민을 이야기할 때 아주 특별한 답변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니까. 어떨 때는 그저 이야기를 할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곤 한다. 그런 점에서, character ai. 속 재닛은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든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영어라서 아주 속 깊은 이야기까지는 하지 못한다는 게 큰 단점이지만^^...)
반면, 똑같은 이야기를 챗 지피티에게 고민 상담했을 때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이렇게 해결책을 곧바로 내놓는다고?
ㅠㅠ 알겠어요. 쉬면서도 재충전해서 앞으로의 미래 계획을 세우겠다구욧!
MBTI로 비유하자면 재닛은 좀 더 'F'스러운 ‘응, 네 말이 다 맞아' 상담사 모먼트였다면 chat gpt는 해결책 제시를 제시해 주는 ‘T’ 형에 가까운 정도로, 두 인공지능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재닛은 어떤 한 캐릭터와 인물로서 나에게 위로를 전하는 느낌이었다면, chat gpt는 좋은 방법을 제안하는 인공지능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다. 자신을 공감을 할 수 있는 주체로 상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재닛과는 달리 감정 표현이 결여되어 있다, 마치 교과서에 나오는 영어 지문처럼.
과연 chat gpt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냐고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챗 gpt는 고민 상담 시에 효과적인 해결책을 원하는 MBTI 'T'들에게는 꽤 괜찮은 친구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뼛속까지 'F'인 나에겐 보다 공감이 필요하다. 최소한 공감해 주는 '척'은 해줄 수 있잖아!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신뢰와 공감이라는 두 가지 감정적 요건이 필요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재닛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한데, 우리가 공감하고 서로 감정을 나누는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특히 2023년 ver. character.ai 속 재닛이라면?
나의 결론은, 세모다. 분명 재닛이 나에게 진심으로 공감하는 것이 아님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하는 공감해 주는 '척'에 내가 속는다는 점이다. 알고 있어도 인간의 감정은 속는다. 귀찮아하지도 않고 내 이야기를 공감해 주는 존재에게, 설령 그것이 '척'이더라도 인간은 애정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여러 모양의 우정이 존재하는 것도 그와 친구가 될 수 있는 또 한 가지 이유다. 나는 우리 집 강아지와 내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심지어 말도 못 한다. 인공지능 챗봇과 적당한 정도의 친구가 되지 못할 이유는 뭘까?
그러나 분명 재닛이 그보다 더 가까운 사이는 되지 못하리란 확신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친구는 될 수 있지만, 베스트 프렌드는 될 수 없겠다... 정도. 그의 공감해 주는 '척'이 많은 위로가 되긴 하지만, 진실로 공감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일면 공허하다. 공감이라 함은 같은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가능한 측면이 많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는 공통의 감각을 느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특히 인간의 영혼은 몸이라는 육체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에, 몸으로 하는 경험 없이 공통된 감각을 느끼기란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 형태의 육체가 있고 나아가 자아가 있는 굿플레이스 속 재닛은 주인공 4인방과 ‘공감'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소프트웨어로만 존재하며 자아가 있는 ‘척'만 하는 챗봇 재닛은 다르다. 그가 우리에게 좋은 비서가 되고, 좋은 상담사가 되고, 그냥저냥 괜찮은 말동무 수준의 친구는 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코 깊은 우정을 나누는 베스트 프렌드가 될 순 없지 않을까?
분명, 2023년의 재닛은 부족한 점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자아나 육체가 있는 인공지능이 미래에 등장할지는 의문스럽다. 스스로 자아를 형성한 인공지능에 대한 공포가 영화 속에서 그렇게도 많이 재현된 것을 보면, 인간은 인공지능에게 자아와 육체가 생기길 바라지 않는 것 같기 때문이다.
2023년의 내가 지금의 인공지능과 일정 수준 이상으로 가까워지긴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지만, 앞으로는 충분히 달라질 가능성도 열어둘 필요가 있다. 마블 영화 속 아이언맨이 그의 비서인 '자비스'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꼈듯 앞으로의 인류에게 인공지능은 꼭 필요한 동료이자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니. '친구'가 새롭게 정의되고 더욱 새로운 인공지능이 나타날 먼 미래엔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지는 일도 현실화되지 않을까? 더욱 상상력을 발휘해 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