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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binsoon Feb 27. 2022

가을의 감각

2021년 10월 월간일기

해가 지난 뒤에 밀린 일기를 쓴다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이왕 시작한 거 늦게라도 끝을 내고 싶다는 생각에 여유가 있을 때 하나씩 쓰려고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빵가게 재습격>의 주인공이 일주일치 밀린 일기를 쓰는 장면이 문득 떠오른다. 물론 나는 일주일이 아니라 다섯 달이나 지난 뒤에 쓰는 거지만. 바쁘게 살기로 결심한 2022년이지만 두 달이 지난 지금도 그렇지 못한 걸 깨닫고 반성만 반복할 뿐이다.



# 평영을 할 수 있습니다


8월 1일부로 수영을 시작했다. 오랫동안 배우고 싶은 것들 중 하나였지만 코속에 물이 들어가는 거부감과 변동적인 스케줄 근무로 매일 정해진 시각에 강습을 받는 건 할 수 없었다. 6월 말일에 퇴사하고 7월 한 달간은 공모전 준비로 정신없었기에 8월이 되어서야 강습을 신청했다. 오랫동안 해오던 달리기가 무릎 통증으로 할 수 없게된 점도 나름의 이유였다.


대학교 1학년 때 친구와 함께 강습받은 적은 있지만 한 달뿐이었고 친구랑 놀다시피 배워서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저녁 수영이라 강습이 끝나고 오는 길에 있는 파전 거리에서 먹었던 파전과 막걸리가 굉장히 맛있던 걸 기억한다. 이번 기회에 아예 백지상태로 처음부터 배우기로 했다. 벽을 잡고 발차기를 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물속에 머리를 넣었다 빼면서 음파음파를 했다. 그러다가 킥판을 잡고 발차기를 하다가 영법을 조금씩 배우기 시작했는데 여기선 특이하게도 자유형이 아닌 평영부터 가르쳐 줬다. 이 얘기를 다른 친구에게 하니 아마도 평영이 비상시 생존을 위해 제일 필요한 영법이니 그런가 보다라고 했다. 그리고 9월 내내 평영만 배우다가 10월이 되어서야 자유형을 배웠다.


강습은 월, 수, 금 아침이었지만 화요일이나 목요일에도 가능하면 자유수영을 하러 갔다. 가끔씩은 강습하는 날 저녁에도 혼자 자유수영을 했다. 강습에서 잘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으면 수영 유튜브를 봤다. 특히 평영은 무릎을 구부렸다 펴면서 반대로 폈던 발목은 직각으로 만들어야했는데 몸이 마음대로 안 움직여서 한동안 애를 먹었다. 그래도 연습을 하는 만큼 아주 조금씩 실력이 늘어서 재미있었다. 그렇게 10월이 될 때쯤 평영을 할 때 자세 지적을 거의 안 받았다. 평영을 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는 되었다.


발차기와 숨쉬기부터 시작해 하나의 영법을 제대로 할 수 있기까지 두 달이 조금 넘게 걸렸다. 누군가 나에게 수영을 할 수 있냐고 물어본다면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수영을 처음 배웠던 시기까지 돌아가면 영법 하나 깨우치는데 십 년이 조금 넘게 걸렸지만 나는 이제 수영을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아직 배워야 할 건 많지만.



# 계절을 온전히 느낀다는 건


영화관 일을 하면 계절감과 멀어진다. 사무실에는 햇빛이 들어오지만 버티컬을 쳐 놓고 대낮에도 전등을 켜 놓아서 햇살이 온전히 들어오지 않는다. 로비에 가면 외부와 차단되어서 밖이 어떤 날씨인지 알 수 없다. 일을 하면서 계절감과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10월 1일, 안성스타필드


그러다 보니 일하는 내내 햇빛이 그리웠다. 원래 술 마실 때 빼고는 담배를 안 피우는데 일할 때 자주 피었다. 힘들어서가 아니라 햇빛을 자주 쬐고 싶어서. 덕분에 평소보다 흡연량이 세 배쯤 늘었다. 비타민D를 채우고 폐를 내주는 꼴이었다.


10월 18일, 제주시


퇴사하고 하루 일과 중에 한 번은 동네 산책을 했다. 특히 노을 지는 시각에 집에 있으면 손해 보는 느낌이라서 매일 해가 지는 시각을 체크하고 30분 전에 바쁜 일이 없으면 산책을 했다. 르른 하늘이 서서히 붉게 물들어 가는 광경을 눈앞에 두면 마치 온 세상이 슬로우 모드가 된 듯 시각의 집중력이 높아진다. 언제나 그 시간을 맞이하면 하루하루의 소중함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10월 31일, 오산 독산성


단풍잎의 붉은색이 이렇게 선명한지 몰랐다
귀 끝에 닿는 가을바람이 이렇게 간지러운지 몰랐다
고개를 젖혔을 때 보이는 하늘이 이렇게 깊은지 몰랐다


10월 중순까지 느긋하게 머물렀던 가을은 갑자기 방문한 겨울 탓에 서둘러 떠나버렸다.

올해 가을의 감각은 유난히 선명하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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