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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년이싸롱 Nov 21. 2023

강박과 불안장애.

불안장애와 공황장애를 아시나요?

5.
내 팬티가 없었다. 엄마는 살뜰하게 속옷을 챙겨주는 분은 아니었다. 언니와 나는 같은 속옷을 공유했기 때문에 팬티는 모두 내 팬티가 아니었다. 양말도 마찬가지였다. 언니는 무좀 있는 발로 신은 양말을 자신이 신는다는 사실을 싫어했다. 그렇다고 빨래를 할 줄 몰랐다. 엄마는 빨랫감을 내놓으라고 가르쳐준 적이 없다.(이걸 가르쳐줘야 아나?라고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난 그랬다.) 그냥 신었던 양말을, 었던 팬티를, 었던 스타킹을 매일 같은 교복을 입듯이 입는 게 당연한 줄 알았을 뿐이다. 어릴 적부터 주기적으로 옷과 속옷을 갈아입혀줬다면 자연스레 배웠어야 했던 것들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달라졌다. 팬티를 매일 갈아입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목욕을 하고 머리를 감고, 하교 후에도 고 자기 전에도 목욕을 했다. 엄마는 단호하게 말했다.
“네 나이에는 매일 속옷을 갈아입지 않아도 돼!”
하지만 내 씻음은 심해졌다. 그래도 나에게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샴푸를 머리카락에 바르고 그냥 씻어내던 나는 제일 착해 보이는 반 아이에게 “넌 머리카락을 어떻게 감니?”라고 물어봐 두피까지 손가락으로 박박 긁어가며 샴푸를 오랫동안 칠하고 물로 많이 헹궈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리고 목욕은 꼭 타월로 피부를 박박 밀어야 한다고 했다. 그 아이의 엄마는 어릴 때부터 그렇게 목욕을 시켜줬고, 조금 커서는 목욕이나 양치를 하고 나면 잘했는지 냄새를 맡아보고 "내 새끼한테 좋은 냄새나네~"라며 칭찬하셨다고 했다.


물론 내가 된장냄새의 원인이라는 사실은 소문이 났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굣길에 나는 일진무리에게 끌려갔다. 일진들은 진짜 나에게 된장 썩는 냄새가 나는지 확인하려고 했다. 내 교복치마를 벗으라고 했고 난 저항했다. 모기만 한 소리로 "싫어"라고 말한 게 고작이지만. 아이들은 피식 웃었다. 그중 담배를 피우던 한 아이가 내 왼팔을 낚아채 팔에 담배를 지져서 담뱃불을 껐다. (아직도 그 흔적은 남아있다.) 그리고는 "씻고 다녀라."라고 말했다.


나는 점점 더 많은 양의 샴푸와 린스를 사용하면서 머리를 감았고 피가 날 때까지 때밀이 타월을 사용했다. 엄마와의 갈등도 심해졌다. 엄마는 샴푸와 린스 비누를 많이 쓰고 빨래를 많이 내놓는 둘째 딸을 타박했다. 아무리 타박하고 큰소리를 쳐도 내 씻음은 심해졌고, 너무 많이 감은 머리카락은 탈모가 시작되었다.(가족들은 내 탈모가 안 처먹어서라고 했다. 물론 난 먹지도 않았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눈에 띄게 두피가 보이기 시작하자 엄마는 거울을 내 정수리에 들이대면서 ‘맨날 머리를 감아대니까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난 또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대머리가 될까 무서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갇혀서 허우적댔다. 머리를 감아도 안 감아도 문제다. 머리를 안 감을 수는 없다. 속옷을 안 갈아입을 수는 없다. 내 불안과 강박은 극도로 높아져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었다. 미친년처럼 머리를 감았지만 린스를 너무 많이 사용했고 그래서 머리는 기름진 것 같았고 그러면 또 머리를 감았다.


씻기 시작하면서 손 끝이 갈라져서 피가 나던 피부가 달라졌다. 난 어릴 때부터 손가락 끝마디가 갈라지는 알레르기가 있다고 여기며 살았다. 엄마는 한 번도 바비인형을 사준 적이 없는데, 내 손가락 때문에 바비인형 같은 고무를 만지면 안 된다고 난 생각하고 있었다. 엄마가 나한테 그렇게 말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왜 그렇게 알고 있었는지 그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냥 내가 기억하는 건 언제부터 인지 알 수 없지만 내 손가락 끝은 늘 갈라져 피딱지가 앉아있어다는 것이다. 그래서 늘 아팠는데 씻기 시작하면서 상처가 아물고, 손 끝이 깨끗해졌다. 그게 너무 좋았고 약간은 스스로 달라졌다고, 내 강박을 지지했다.  

생리를 시작하고도 난 엄마에게 생리대를 사달라고 말하지 못했다. 왜 말을 못 했을까? 분명히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뭐든 사달라고 하면 거절당했던 경험들이 엄마에게 더 이상 요구하지 못하게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생리대를 살 용돈이 없어서 생리대를 훔쳤다. 이상하게 불안이 가라앉았다. 물건을 훔치면 불안이 사그라들었고 난 도벽이 생겼다. 부모님 지갑에서 돈을 훔치기 시작했고, 생리대를 훔쳤고, 머리핀을 훔쳐봤고, 옷도 훔쳐봤다. 꼬리가 길면 당연히 밟히듯 생리대를 훔치다가 잡혔다. 부모님과도 잘 아는 사이의 동네 슈퍼에서였다. 어릴 적부터 외상으로 라면이나 과자를 자주 가져다 먹었던 슈퍼라서 슈퍼 할머니는 나에게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말라"라고 할 법도 한데 그 자리에서 집에 전화를 걸어 엄마를 슈퍼로 불러들였다. 엄마는 날 때리고 생리대를 제자리에 가져다 놓게 했다. 난 생리대가 필요했는데.


우울증과 불안은 계속되었다. 그럴 때마다 필요하지도 않으면서 부모님의 지갑에서 돈을 훔쳤다! 많은 여성들이 생리증후군으로 물건을 훔친다. 난 그 기분을 이해한다. 하지만 잘못이란 걸 안다. 나쁜 짓을 하면 불안이 사라지지만 죄책감이 밀려온다. 자기를 비하하게 되고 '나는 나쁜 사람이다.‘라는 신념이 굳어졌다. 그럴수록 나는 더 착한 사람. 밝은 사람, 절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닌 것처럼 행동했다. 진짜 나와 가면을 쓴 나 사이의 괴리감이 커질수록 불안도 커진다. 그리고 내가 나쁜 사람이 될수록 가족들이 더 날 싫어한다는 피해의식에 사로 잡혔다. 내 마음은 점점 가족들과는 멀리 떨어져 헤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그런 마음이 잘못이라고 나는 나쁜 사람이라는 양가감정에 시달렸고, 그럴수록 가족들에게는 더 친절하게 더 희생적으로 구는 내가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불안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했다. 내 안의 변화를 내가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사는 게 싫고 재미도 없었다. 이 상태가 계속되면 편안하지 않은 상태의 불안 파동이 마치 BGM처럼 늘 상 나와 함께한다. 온몸에 작은 파동이 계속 느껴지는 것이다. 늘 느끼기에 내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저 집중하기 어렵다. 무기력해지고, 사소한 일에도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스스로를 상처 내고 돌보지 않게 돼버린다. 학교에서 내 별명은 "또자"가 되었다. 허구한 날 잔다고 국어 선생님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웃긴 건 고등학교 때도 별명이 똑같았다.)


무기력함으로 매일 학교에서 자기 시작하자 내 성적은 곤두박이칠 쳤다. 원래 공부를 열심히 하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수업을 듣던 중학교 1학년까지는 시험공부를 따로 하지 않아도 중상위권에 머물렀다. 강박과 불안장애가 생기면서 중학교 2학년 2학기에는 완전히 하위권으로 뚝하고 성적이 떨어졌다. 엄마는 갑자기 떨어진 성적에는 크게 놀랐는지, 큰 이모에게 소개받은 친구 분에게 수학을, 그룹과외로 영어를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과외는 효과가 있었다. 과외시간에는 잘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건 공부가 됐다. 물론 복습을 하거나 자습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수학과 영어는 우열반에서 상급반이 되었다. (우리 중학교는 국, 영, 수 과목은 시험 등수에 따라서 3개의 반으로 나눠져 이동수업을 하는 학교였다,)


난 과외가 싫었다. 특히 영어 그룹과외가 싫었다. 어느 날 과외가 끝나고 함께 공부하는 아이들과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 때였다. 신발을 신으려고 상체를 구부린 아이가 내 바지 허벅지 부근이 낡아 해진 것을 발견하고는, 이게 뭐냐며 내 바지를 잡아당겼다. 당시에 나는 거의 매일 무릎까지 오는 쫄바지(지금의 레깅스같이 생긴 바지였다)를 입고 다녔는데, 허벅지가 스치는 안쪽의 시접부근이 해져 작은 구멍들이 나있었다. 난 또 당황했다. 속옷을 열심히 갈아입었는데 바보인 건지 내 바지가 그렇다는 사실은 또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두려웠다. 난 그나마 하던 과외교습의 공부도 하지 않게 되었다. 아니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하는 게 맞다. 내 학습능력은 바닥이었다. 공부를 한다고 책을 보고 앉아있어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얼마 못 가 과외를 그만두었는데 엄마는 다른 건 몰라도 날 공부시키려 하셨고 고등학교 때도 과외선생님을 붙여주곤 했다. 물론 고등학교 때도 공부를 잘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학교에서 맨날 자는데 무슨 성적이 잘 나왔겠나. 내 사춘기는 우울감과 불안, 강박으로 점철되어 있다. 만성화되어 가는 불안은 평생 동안 나를 지배했다. 선천적인 다한증 환자 같이 손발은 늘 젖어있다.


하지만  나는 불안할수록 무기력할수록 더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았다. 더 이상 냄새가 나지 않고는 친구도 한 두 명 생겼다. 전라도 광주에서 전학 온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는 친구였지만 그때의 나는 누군과와 깊이 있는 우정을 쌓거나, 친구와 싸우면서 타인들과 맞춰가는 과정을 배울 여력이 없었다. 그 친구는 다른 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했고 내 욕을 하고 다녔다. (그때는 상처였지만 이제는 다 이해한다.) 길에서 만나도 인사조차 하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나와 제일 친한 친구는 오직 나뿐이다. 이런 생각은 지금까지도 나에게 박혀 있는데, 아무리 살갑게 굴어도 친하게 지내도 모두 다 한 때일 뿐이라는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이런데도 오래된 좋은 친구들이 있다는 건 내가 인복이 많다는 증거다. 일련의 이런 식의 양가감정을 자주 경험한다. 뿌리 박힌 상처가 남긴 흉터라고 할까.









TIP. 나처럼 큰 사건을 겪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린 시절 “너 대학만 가면 엄마는 이혼할 거야”라는 말을 듣고 자라는 아이는 대학을 가는 것, 어른이 되는 것에 대한 불안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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