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천천히 자라줘

<서울 아이>_박영란, 우리학교

by 피킨무무





_ 세상에서 가장 슬픈 개다리춤

딱히 춤에 재능이 없는 아이들의 분위기 전환 장기로 많이 쓰여왔던 이 우스꽝스러운 춤이 작품 속 형제에게는 사랑과 관심을 요구하는 절절한 표현방식으로, 또 슬픔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매개체로 작동한다. '슬픈 광대'의 역설처럼 가장 우울한 이가 겉으로 보기엔 가장 밝다. 형제가 개다리춤을 추며 웃을 때 독자인 나는 울고 싶어졌다.


_ 어른아이가 알려주는 인생꿀팁

작품 속 형은 열 다섯부터 일곱 살 동생을 챙기며 어른 없이 단둘이 살아왔다. 현자처럼 동생에게 전수하는 인생꿀팁은 나이 먹은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위험한 상황에선 개다리춤을 춰서라도 사람들을 웃겨라,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집안사정의 바닥까지 드러내지 마라, 선의의 거짓말도 거짓말일 뿐이다.


_ 병풍처럼 아이를 둘러싼 이들

병풍 같다는 말은 실직적 효력이 없다는 의미로 흔히 부정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지만 여기에선 긍정적으로 써보고 싶다. 귀차니 아줌마, 이모, 옆 방 누나, 맥도널드 알바 누나, 주인집 할아버지, 급식소 봉사 학부모들이나 형의 배달알바 친구들까지 겉으로는 누구도 제도적으로 혹은 적극적으로 주인공을 구제해 주는 이는 없어 보이나, 간접적으로 주인공을 지지해 주고 종종 살피고 들여다본다. 냉장고를 채워주고 말동무를 해주고 인생에 공감해 주며 가족이 해체되지 않도록 병풍처럼 아이를 감싸고 있는 것이다. 이 느슨한 연대가 아이를 키운다. 나는 사회 속에서 이런 역할을 어느 정도 수행하고 있나 되돌아보게 된다.


_ 우리는 모두 희망이야

2014년 <서울역>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이 작품은 개정판에서 <서울 아이>로 제목이 바뀌었다. 개인적으로는 원제 <서울역>이 더 잘 어울리는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떠나고 돌아오는 모든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배웅하고 맞이하는, 뭔가를 끈질기게 기다리는 이들이 바로 그곳에 있고, 이 작품은 주인공 희망이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들 모두의 이야기라고 생각되어서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모두 희망이다.


_ 부디 천천히 자라줘

성장소설을 읽으며 주인공의 성장을 바라지 않았다. 이제 희망이는 올해로 스물한 살이 되었으려나. 부디 천천히 자랐길, 마지막 페이지에서 뚱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희망이의 귓가에 크느라 고생했다, 속삭여주고 싶다.



"형은 선의의 거짓말이라도 거짓말은 거짓말일 뿐이라고 했다. 선의의 거짓말이 나쁜 이유는 실제를 보지 못하게 가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은 끝에 가서는 완전한 절망을 맛보게 하기 때문에 '더 지랄 맞은 거'라고 했다."p.40

"내가 '뽁뽁'거리면서 걸어가면 사람들이 바라본다. 그러면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차곡차곡 모아 뒀다가 엄마나 아버지나 형의 사랑이 필요할 때 대신 꺼내 쓸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사랑이 없으면 관심이라도 받아야 산다."p.55

"형은 정기적으로 꼬박꼬박 돈 내는 일을 가장 싫어했다.
인생이 정기적으로 되는 게 아닌데 어떻게 매달 정기적으로 돈 내는 일을 할 수 있냐?"p.106

"행복에 관해서라면 옆 방 누나도 말해 준 적이 있다. 행복했을 때 이야기를 해 달라고 옆 방 누나에게 조른 적이 있다. 나의 행복과 누나의 행복이 어떻게 비슷한지 알아보고 싶었다. 그러면 내가 행복했던 오 년을 상상하는데 도움이 될지 몰랐다.
그때 옆방 누나는 이렇게 말했다.
얘야, 그건 슬픈 이야기란다.
행복이 왜 슬픈 이야기가 돼요?
계속될 수 없기 때문이지.
누나가 뭘 잘못했나요?
뭘 잘못했는지는 알 수 없단다. 행복한 사람들은 누구나 아주 성실하단다. 열심히 살지. 그런데도 결국 불행해지고 말아. 그래서 행복했던 때 이야기가 슬픈 이야기가 되는 거란다."p.108

"무엇보다 귀차니 아줌마 곁에 있으면 편안하다. 어쩌면 아줌마가 세상을 귀찮아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세상을 귀찮아한다는 것은 행복해지려고 아등바등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행복 때문에 아등바등하지 않는다는 것은 쓸데없는 일에 진을 빼지 않는다는 뜻이다. 적어도 귀차니 아줌마는 행복이나 불행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행복이나 불행 같은 것이 아줌마 인생을 어쩌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편한 것이다."p.114

"문득 아줌마가 아이처럼 구는 게 형과 내가 개다리춤을 추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줌마는 위험을 느끼거나 제정신으로 견디기 힘들 때 아이처럼 구는 것이다. 형과 내가 위험할 때 개다리춤을 추듯이, 아줌마는 아줌마 방식으로 위험을 빠져나가는 거라고 생각했다."p.216

"전에 옆 방 누나가 아무리 위험한 순간도 지나고 나면 별 거 아니라고 했어요.
재수 없으면 평생 힘들 수도 있어.
평생 힘들면 어떻게 살아요.
할 수 없지. 힘들다고 인생이 아닌 것은 아니니까.
말은 쉽죠.
난 요즘 그런 생각을 해. 인생은 자기 책임 반이고, 세상 책임 반이야. 재수 없게 하필 이런 세상에 태어나서 팽개쳐졌다고 해도 자기 책임이 반은 된다는 거. 그러니까 세상이 인생을 빼앗아 갈 수는 없다는 거지.
아줌마와 나는 재수 없는 경우죠?
그럴걸.
재수 없는 인생은 지랄맞대요.
누가 그래?
형이요.
참 좋은 형이다."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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