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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킨무무 Mar 14. 2024

내 맘대로 2차 창작을 해보자!

<보트하우스>_욘 포세, 새움






여기 강박과 불안증세에 시달리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심리적 불안을 떨치기 위해 집착적으로 글을 쓴다. 장기적인 직업을 가진 적도 없고,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도 않는다. 작년 여름 그의 옛 친구였던 크누텐을 우연히 마주친 이후로는 외출도 하지 않고 이전에 비정기적으로나마 연주하던 기타도 내팽개친 지 오래다. 그의 글은 심리적 불안감이 잘 드러난다. 예를 들면 이렇다.

"내 귀에 파도 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내게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았던 듯하다, 내 몸 안에 무거운, 극심한 불안감이 자리해 있다, 나는 긴 보폭으로 걸음을 서두른다, 달려서는 안 될 것 같다, 하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길을 따라 걸으며 파도 소리를 듣는다, 어릴 적 들었던 그대로의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파도는 내 삶 전체를 관통해 계속 또 계속 치고 있었다, 어릴 적에 그 파도 소리를 들은 이후로는 여러 해 동안 그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이제 극심한 불안감 사이로 그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p.134

인용문이 단 한 문장이라는 것을 알아챘는가? 이렇듯 반복적이고 두서없는, 문단화가 이루어져 있지 않은 글은 불안증상에 시달리는 남자의 심리를 효과적으로 잘 드러내어 보여준다. 자칫 산만해 보일 수 있는 스타일인데 몰입감이 좋다는 게 신기하다. 역시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스킬인 것일까, 혹은 후광인 것일라나.

글은 총 3부로 이루어져 있다. 주인공이 크누넨과 그 아내를 만나 이루어지는 이야기인 1부의 비중이 가장 크고 2부는 나의 시점으로 크누넨 버전의 이야기를 반복하는 특이한 짧은 글인데 개인적으로 주인공이 강박적으로 쓴 이야기가 바로 2부 그 자체가 아니겠나 추측한다. 3부는 매우 짧으며 어머니가 주인공에게 크누넨의 아내의 익사 소식을 전하는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는 이 장면을 끝으로 글쓰기를 중단한다.

이 작품은 인간의 근원적 불안을 잘 묘사한 심리 소설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일종의 스릴러로 소화해서 읽었는데 이유는 크누넨과 나의 과거사에 모종의 사건이 있었다는 뉘앙스가 글 전체에 매우 강박적이고 반복적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왠지 모를 으스스한 분위기까지 더해져 필시 무슨 사단이 났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물론 주인공은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독자에게 그 사건을 털어놓지는 않지만 스릴러 매니아(?) 독자로서 개인적인 해석을 보태어 2차 창작에 도전해본다.

크누텐과 나는 어린 시절, 밴드를 결성하여 함께  연주를 할 정도의 절친이었으나 둘 사이에 미묘한 여자문제가 생기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여성을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크누텐이 뺏은 것이다. 나는 허무, 우울, 배신감과 질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의도치 않게 여성을 강간살인치사로 바다에 빠뜨려 죽게 한다. 물론 이 사건은 자살로 처리가 된다. 위의 인용문에서 그의 삶 전체에 불안을 끼얹은 파도소리는 이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가 크누텐의 아내를 만났을 때 파도소리를 상기하는 것은 동시에 크누텐의 아내 역시 바다에 빠져 죽게 되리라는 그녀의 운명을 가리키는 복선이다. 번역본을 읽었기에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작품의 중간에 크누텐의 아내가 나의 이름을 레이프(노르웨이의 흔한 남자이름이면서 영어로는 강간을 뜻한다.)로 들었다는 대화 또한 의미심장하다. 이 사건으로 크누텐은 이 동네를 떠나 나와 재회하기까지 돌아온 적이 없으며 옛 친구를 만나는 것을 매우 꺼린다.

작중 '나'가 직접 쓴 글인 2부에서 크누텐의 입장이 철저하게 나의 시점으로 기술되는데 어린 시절의 나의 심리(좋아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불안해하는)를 크누텐에게 완벽하게 투영하여 묘사한다. 이것은 내가 이 시절의 이 사건으로 트라우마를 얻고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단 것을 알려주는 단서가 된다. 그러므로 나는 여전히 어머니의 집에 얹혀 살며 독립하지 못한 채 고립되어 살아가다 크누텐과 마주친 이후로 불안의 증상이 더욱 심해진다. 마지낙 장면에서 크누텐의 아내가 익사했다는 소식에 내가 과거에 그 여성을 죽인 것 처럼 크누텐의 아내의 익사 역시 자살이 아닐 지 모른다는 극심한 불안감, 동시에 살인자가 나뿐만은 아니겠구나, 하는 안도감이 나를 덮쳐오며 나는 글쓰기를 중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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