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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기 Dec 21. 2024

눈이 오는 날에.

불편하지만은 않은. (34번째 이일)

올해 말도 안 되는 폭설이 겨울을 알렸다.

모두들 생각지도 못한 눈으로 출퇴근 길은 비상이 걸렸고

버스나 택시는 오르막 길을 오르지 못했다.

무릎까지 푹푹 빠져대는 눈길을 걸어서 각자 힘겹게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도 연이어 폭설이 계속된다는 재난 문자가 수시로 날아오고

많은 사람들이 근심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모두가 걱정스러운 밤을 보내지는 않았다.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고

모처럼만에 내린 눈을 즐기기로 한 모양이었다.

각자 집에 챙겨둔 장갑부터 눈오리까지

모두 챙겨 집 앞으로 나왔다.

약간의 언덕이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썰매가 등장했다.

그중엔 플라스틱 썰매가 아닌 쌀포대도 있었다.

쌀포대라니.

정말 오랜만에 보는 관경이었다.

목도리와 장갑으로 무장을 한 어린아이 둘과 함께였는데

천진난만한 웃음소리를 내며

아빠가 먼저 쌀포대에 누웠다.

그리고는 발을 구르며 내리막을 내려가려 했는데

눈이 너무 많이 쌓인 탓에 생각처럼 잘 미끄러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모두가 웃음으로 가득했다.

정말 행복해 보였다.

그런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나는 한쪽에 눈오리를 만들어 줄을 세우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환한 미소를 지었고

누군가는 커다란 눈을 굴리며 눈사람을 만들었다.

모두들 내일의 걱정은 접어둔 듯했다.

그 순간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즐거워 보였다.

그리고 나도 행복했다.

너무 추운 날씨 탓에 얼마 뒤 집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그 뒤로도 "꺄악" 거리는 웃음소리는 한동안 끊이지 않았다.

정말 오랜만에 걱정 없이 웃었던 것 같다.

어른이 되고

눈이 온다는 것은 그저 불편한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날도 그리고 그다음 날도 그 생각이 크게 빗나가지는 않았지만

모든 순간이 싫지만은 않았다.

비 오는 날

신발 따위 젖어도 상관없다는 듯

물장구를 쳐대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했다.

정말 오랜만에

아무도 밟지 않은 눈 마냥 순수했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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