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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훌리아 Feb 12. 2020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파스칼 키냐르


내레이터



그녀는 머리칼을 치켜 올려 밀짚모자 밑으로 

밀어 넣었지요.



정원 끝에, 

버드나무들, 그리고 산사나무와 섞여 

개암나무들이 자라는 곳에 

박하나무들 속을 비틀거리며 걸어

연못에서 1미터 혹은 1미터 반 되는 곳에,

가족이 입회한 가운데

유해가 뿌려졌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연못에 뿌렸습니다.

사랑했던 아내의 유해를 천천히 물 위로

흘려보냈고,

자신의 시선을 쏟아부었고,

자신의 숨결을 퍼뜨렸고,

기슭에 사슬로 맨 균형 잡힌 보트에 

올라탔고,



한 손을 들어 아직 온기가 남은 그녀의 삶을 

뿌렸습니다. 

그녀의 몸은 어두운 물의 회색빛 수면 위에,

줄지어 매인 배들의 검은 형체들 옆에

거의 그대로 떠 있습니다.



흩어진 유해들이 밤의 숨결 속에서

차츰 눅눅해지며,

느리게, 느리게 물로 젖어 들어가다가

이윽고 사라집니다.

입을 쩍 벌린 작은 잉어들과 모셈치들이 있는 

물속에서 차츰 사라져 갔습니다.

희한하게도 물고기들의 입가에

하얀 테두리가 생겼네요.

참으로 아름답던 갈색 머리의

젊은 여인은 그렇게 잔잔한 회색빛 수면

아래로 사라졌습니다.

갓 낳은 딸을

방 안 요람 속에

홀로 남겨 둔 채 말입니다.



한창 젊은 나이의 어머니는

그렇게 물에 비친 나뭇가지들의

움직이지 않는 그림자 아래로 사라졌고,

연못에 비치는 지나가는 하얀 구름의 

그림자들  아래로 사라졌고,

잎사귀들 틈새를 꿰뚫는 황금빛 햇살의

반사광 아래로 사라졌습니다.



사라졌단 말입니다, 당신이 사랑했던 아내가,

연못 속으로,

나뭇배 옆으로,

그녀가 사랑했던 정원 한가운데로.





차마 떠날 수 없어 벤치에 앉아 있는 거야
내 몸이 어둠에 휩싸일 때까지.

네 엄마가 내 삶이란다.
난 그녀를 사랑해.
그녀의 습관들, 시간들, 냄새들,

시미언 - 딸 로즈먼드에게





시미언


이 집이 내겐 미로란다. 이 정원이 내겐

미로란 말이야. 물론 사람인 그녀, 에바,

네 엄마가 아니라고. 난 미친 게 아냐.

하지만 이 정원은, 그녀가 수태했던 거니까

그녀의 얼굴인 셈이지.

왜냐하면 정원이란 얼굴이거든!

그저 꽃을 심은 화단이 아니야.

그저 채소밭이 아니란다. 더구나 흐드러지게

핀 백합이며 국화, 글라디올러스의 보급소는

더더욱 아니지. 우리는 성인들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축일이면 교회 꽃병에 꽂으려고,

주 예수의 희생을 기려 제단보에 

올려놓으려고,

죽은 가족을 추모하기 위해 무덤 판석에

놓으려고 꽃을 꺾잖니.

정원은 늙지 않는 신비로운 얼굴이란다.





에바, 정원은 기억나지?

시미언 - 아내에게




에바


아뇨.

그냥 그런 척하는 거예요. 예의상.

실은 여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요!

당신네들, 살아 있는 사람들은

절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죽음이 기억을 없애 버리거든요.

그곳은 시체로 뒤덮인 전장이에요.

황폐한 풍경과 구덩이들, 분화구들,

아득한 황야로 변한 폐허의 도시들이죠.

게다가 움직이지 않는 어둡고 어마어마한

바람이 담뿍 들어차 있어요!

이제 난 돌아가야 해요.

여기까지 온 지금, 생기 있는 대기 속에

눈부신 빛 속에서

내 모습을 당신에게 보이는 게 저로선

힘들어요. 내겐 고통이에요.





내 행복의 책, 자연 그대로의 노래책 
『야생 숲의 노트』

시미언 피즈 체니의 유고집





로즈먼드



내게서 뭔가가 빠져나간 느낌이 들면서

행복해졌어요.

강물은 흘러가면서 희한하게도 이름이

바뀌잖아요.

아버지는 어머니에게서 정원에 대한 사랑을

이어받았어요. 아버지는 평생 그 일을 

수행하셨고, 이제는 제가 돌봅니다.

이제는 감동도 제 몫이죠.



아버지는요, 엄마의 목소리를 이어 갔어요.

엄마의 목소리가 내리는 지시들을 어김없이

이행하셨지요. 예전에 엄마가 애지중지하던

꽃들에 대한 사랑도 그대로 답습했고요.


아빠, 저도 좀 봐 주세요, 제 눈에 눈물이

흥건하잖아요!






슬픔은 불행이 아니라 불행을 치유하는 것

키냐르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  저자  파스칼 키냐르




이 책은 음악에 대한 찬가입니다.
죽은 이들에 대한 애도와 그리움의 음악, 위로가 되는 음악, 
새들의 노랫소리에 담긴 생생한 자연의 소리 같은 그런 음악 말입니다.

프랑스 도빌 시의 '책과 음악상'   키냐르의 수상소감 









<마무리>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제목이 따뜻해서 좋았고, 시미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이 물씬 느껴져서 애잔했고, 딸과 함께하지 못하는 시미언이 이해가 되면서도 안타까운... 그런 짧고 긴 여운이 남던 책이었습니다. 키냐르는 이 책은 <세상의 모든 아침>과 한 쌍을 이루는 작품이라 합니다.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장르는 세 명의 배우 (시미언, 내레이터, 1인 2역 에바와 로즈먼드)가 최소한의 소도구만 놓인 희극 무대를 연상하게 됩니다. 


느리게 읽었으면 더 좋았을 그런 책.











세상의 모든 아침

https://brunch.co.kr/@roh222/30



파스칼 키냐르 매거진

https://brunch.co.kr/magazine/pascalquign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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