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이 속삭일 때
외로움이 찾아들 때 눈물이 난다. 이 눈물은 인간인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또한 쌓인 감정에서 시작된 슬픔의 단면도 아니다.
누구에게나 이런 느낌과 감각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대면한 어떤 상대에게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들었다 해도 정확히 공유되지 않았거나 나의 수준과 상대의 수준 정도의 차이로 내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외로움’이란 단어를 빌려 쓰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외로움이 아니다. 그것은 부재와 결여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고 사전적 의미를 떠올려보아도 임시방편으로 명명했을 뿐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렇다, 다르며 틀리다. 내 영혼이 나를 불러 세워 위로하며 어루만지는 그 순간을 어린 나는 ‘외로움’이라 여겼고 여전히 지금도 나는 ‘외롭다’고 여긴다.
어린아이는 가족의 사랑이나 지지로 정서적 안정을 얻고 그들을 본받으며 성장한다. 또한 개체로서 성숙해지는 모든 단계에 가족의 손길이 닿는다. 하지만 나의 내적 성장 과정은 미묘하게 다르다. 나의 양육자가 자신의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동안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홀로 사색하고 탐구하는 과정을 통해 성장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삶을 대하는 태도나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있어서 매우 미숙했다. 이 미숙함은 악의적이지 않은 지점에서 시작된 순진함, 혹은 나약함에 가까우며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행동 양식이 아니었다. 그 결과로 우리 가족은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었고 내가 우리 가족의 보호 아래 미성년으로 존재하는 한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있었다.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한한 지지와 사랑으로 스스로 치유하는 것, 외부의 그 어떤 존재보다 큰 영향력으로 자신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진실한 대화를 자신의 영혼과 나눈다는 것은 아무래도 홀로 있는 순간이 많다는 의미이고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고 해도 결국 침묵 속에 혼자인 나는 인간이어서 해소되지 않는 어려움이 뒤따랐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혼자라는 형태는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난처한 법이니까.
한때는 혼자라는 두려움에 압도되어 타인에게 기대어 구원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안다. 내 영혼의 속삭임을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외부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아직도 혼자라는 것은 좀 난처하긴 하지만 괜찮다. 나의 영혼은 구석지고 무한한 어둠 속에 한 점인 상태로 내 곁에 있고 나는 그것과 항상 함께이고 항상 따로이다.
나는 불가능과 불확실함 속에 천천히 타인으로부터 근본적으로 고립되며 고립된 영역 그 안에서 온전히 머문다. 나의 영혼이 나를 찾을 때, 비로소 나는 내가 되므로 홀로 내 영혼을 느끼는 시간을 가능한 한 충분히 가지려 한다.
비로소 온전히 내가 되는 시간, 타인의 방해를 받지 않고 사방이 막힌 공간에 혼자 있는 바로 그때. 나의 육체는 이 순간을 불편하게 여기는 것 같다. 비로소 내가 되는 그때 심박수가 늘고 소소한 복통이나 두통을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몸의 불편함은 그리 머지않아 서서히 사라진다. 잠시 생각 멈춘 후 숨을 쉬고, 눈을 깜빡이며, 귀로 흘러들어오는 세상의 소리를 듣고 흘려보낸다. 파도처럼 일렁이는 감정의 물결을 타기도 하고, 의미 없는 누군가의 말을 재생하기도 하며, 문득 누군가의 얼굴이 감은 내 눈앞에 다가왔다 흩어진다. 몸에는 아무 이유 없이 많은 것이 기억되어 있고 필요 이상으로 가공된 서사와 감정으로 인해 눈시울이 뜨끈해지긴 하지만 내 영혼을 어루만지는 시간을 보내고 나면 잘 다려진 셔츠처럼 마음이 평평해진다.
그리 오래지 않아 다시 구겨질 마음이어도 그 시간을 갖지 않았던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다시 힘을 얻고 새 의지를 다지므로 보다 큰 심적 여유와 평온함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이 쌓이고 쌓이면 내 곁의 그 누군가가 의도가 있든 없든 심란하게 굴어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다. 외부 자극으로 동요할 수는 있으나 평온한 내 자리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상태가 내가 이르고자 하는 곳이다.
나는 결국 내재된 수많은 궁금증과 호기심을 스스로 탐색하고 깨닫기를 반복한다. 심각한 오류에도 불구하고 습관처럼 탐색하고 깨닫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딱딱한 것을 입에 넣고 시간을 들여 천천히 불린 뒤 씹어 삼키듯 가족의 삶과 죽음을 오랜 시간 동안 이해해보려 했었다. 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선생님. 이들은 병으로 죽거나 스스로 죽음을 택한 나의 사람들이다. 천천히, 계획적으로 자신의 낙하지점을 정했고 성공했다.
극단적으로 삶을 멈춘 사람과 서서히 죽음을 향해 걸어간 사람은 남겨진 이들에게 구김을 남긴다. 자신이 베어질 날을 정한 '나의 소나무'처럼 '나의 사람들'이 다양한 형태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무리했다는 것이 나를 더욱 처연하게 만들었다. 살아있는 내가 가늠할 수 없는 죽음의 무게와 깊이감 때문이었다.
그들은 서툰 방식으로 생을 마감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수만 번 자신을 죽여봄으로써 하늘타리에 앉았던 나비가 훌쩍 날아오르듯 자연스럽고 주도면밀하게 삶을 마칠 수 있었을 것이다. 길을 걸으며, 대화를 나누며, 잠이 들고 깨어나며, 밥을 먹으며, 바느질을 하며, 어린 나를 업고 어르며, 술을 마시며, 혹은 책을 읽으며 계속, 계속, 계속, 계속 자신이 성공적으로 죽음에 이르는 방법을 도모했을 것이다. 가끔은 속으로 소리 없이 울고, 가끔은 허탈하게 홀로 웃고, 가끔은 거울 앞에서 얼굴을 찡그리며 죽음을 떠올렸을 것이다. 어디선가 잘 살고 싶은 누군가가 치열하게 삶을 계획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 그들은 완벽한 죽음을 위해 치밀하게 고민하고 계획했을 것이다.
갑자기 줄을 끊고 달아나는 연처럼 툭 끊어져 사라진 이들은 마땅히 다다를 곳에 다다랐을 것이라 믿는다. 살아남은 나는 다다를 곳을 알지 못한 채 흐느끼고 배회하기도 하지만 결국 나 역시 마땅히 도달해야 하는 평온한 낙하지점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나의 특별한 그냥 '새'는 언제부터인가 나를 향해 날개를 접지 않았다. 이제는 서로 뜻을 나누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특별한 '소나무'는 잘게 잘라 광에 차곡차곡 쌓아 놓았고 그를 벤지 몇 해가 지났지만 아직 그의 장작을 땔감으로 불에 넣지 않았다. 가끔 나는 그 나무토막을 들어 냄새를 맡았다. 소나무가 이 세상에서 보낸 긴 시간과 시간 속의 바람과 흙의 양분, 뿌리를 지나며 흐르던 물길이 나에게 전해져 왔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나 없는 것, 지금은 있지만 과거와 미래에는 없는 것, 우리의 모든 것은 바뀌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기억되거나 이해된 것으로 남게 되어 있다. 그 정도의 사실 만으로도 덜 외로울 것 같았다.
'백자고진이의 아들' 기백은 학교에 입학할 즈음 그의 어머니가 서울로 데리고 갔다. 조금은 상기되어 내게 사실을 알린 후 선채로 흐느껴 울었다. 나는 기백을 향해 축하와 축복 사이에 어정쩡히 있었다. 기백은 얼마 지나 눈물을 닦고 씨익 웃으며 중지와 약지를 접어 흔들어대며 말했다.
"피스~~~"
"피스~~~" 중지와 약지를 접어 흔들며 나도 따라 말하며 웃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나의 눈과 몸과 마음에 닿는 모든 것, 곧 그것이 나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외로움이란 것이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 오히려 진짜 특별한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요즘이다.
지난 월요일, 산 기도를 마치고 돌아가려 하얀색 포니픽업 시동을 걸던 목사가 두엄 곁의 나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형제님! 제가 아는 자매님 만나볼래요?"
내가 양재기를 든 채 피식 웃으며 그냥 섰으니 목사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 그게, 내가 다음에 올 땐 그 자매님 사진을 가지고 온다고! 아, 근데 그 자매님은 형제님을 알고 있어요.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해요."
내가 허리를 굽혀 인사하니 목사는 곧 엑셀 밟는 소리를 남기고 맵시 있는 포니가 꽁무니를 보이며 멀어졌다. 나는 조금 들뜬 기분이 되어 연한 금색 양재기를 괜히 만지작거린다.
귀가 살짝 붉어진 현재를 사는 내가 나에게 중지와 약지를 접어 흔들며 인사한다.
"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