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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파파 Jan 08. 2021

1%의 가능성을 무시한 우리는 정인이를 홀로 남겨두었다

정인아, 미안해

태어난 지 16개월밖에 되지 않은 정인이가 죽었다.
그 어린 생명이 죽기까지 우리 사회의 어떤 아동보호 시스템도 작동되지 않았다.
의료기관도, 아동보호 전문기관도, 경찰도, 우리도...


정인아 미안해, 미안해... 아무리 외쳐도 어린 정인이는 돌아오지 않는다.

분노는 슬픔을 느끼는 이들에게 남겨진 미완의 숙제다. 

가뜩이나 심난한 세상에 연초부터 해소 불가능한 공분이 싹튼다.


우리의 삶 주변에는 늘 나쁜 사람들과 더 나쁜 제도와 법률이 있었다.

반면 더 착한 심성을 가진 이들과 인간의 얼굴에 가까운 제도나 법률 또한 있었다.


어느 사회의 성패는 이 둘 사이의 어느 한 좌표에서 결정된다.



만약, 1%의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면.


정인이 사건을 전후해서 의사의 고백이 있었다.

"아동학대가 아닐 가능성이 99% 이더라도 1%의 가능성이 있다면 누군가 행동을 해야 한다고."

그 가능성 사이에서 좀 더 많은 누군가가 의심과 고민을 하고, 신고받은 기관이 1%의 가능성에 포커스를 맞췄다면 결과는 어떠했을까.


우리는 늘 시스템이나 법률의 부재를 말하지만, 인간이 살아온 어느 시대나 어떤 사회도 전부를 아우르는 제도나 법률은 없었다. 그렇다고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 같은 빅브라더식의 예방 시스템을 갖춘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이는 음주운전자에 대해 강력하게 처벌하는 법 개정이 또 다른 음주운전자를 막지 못하는 것과 같다. 결국 사람이 문제다. 모든 문제는 사람으로부터 시작돼서 사람 때문에 끝난다. 곧 사람이 희망이기도 하고 재앙이 되는 까닭이다.


타인의 불행을 관전자의 입장에서 방관하는 이들의 잘못은 크다. 오히려 부족한 제도적 미비점을 보완하고 종사자들에게 동기 부여할 수 있는 여지는 늘 그들에게 있었다. 책임과 권한이 있는 누구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타인의 불행을 방조한 구경꾼일 수도 있다. 돌아보면, 불행한 사건 사고 이후의 서투른 반성이 무슨 소용이 있었던가.


사회구조를 구성하는 각 제도와 시스템은 독립성과 전문성을 전제로 한다. 이들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해줄 때 사회의 안전성은 굳건해진다. 하지만 권한이 부여된 이들이 충분히 숙고하고 관찰하지 못했다면, 일반인과 전문가의 신고가 있었음에도 불행을  예방하지 못했다면... 적어도 이들에게 직무유기와 태만이라는 죄를 물어야 하지 않을까.



불행의 3박자는 늘 동행한다. 


우주로 날아가는 로켓은 수소 발사체 로켓 연구자와 컴퓨터 엔지니어, 물리학자와 천문학자 등이 모여 만들어 보낸다. 만약 어느 누구 하나 임무에 소홀할 때 우주선은 날아가지도 못하거나 떠오르더라도 본 궤도에 오르지 못한다.


우리 사회의 안전망 또한 여러 기관과 개인들의 정합적인 집합으로 이루어진다. 일부라도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사회제도는 실패하고, 약한 고리의 누군가는 위험에 빠진다.


어쩌면 정인이의 죽음은 의료기관, 경찰, 아동보호 전문기관의 직무유기의 총합일 수도 있겠다. 아무도 그 무엇을 책임지지 않는 우리 사회의 면을 드러낸 사건일 수도 있다. 작은 나사 하나가 우주선 폭발이라는 대참사를 불러오듯 누군가의 소극성이나 적극적 외면은 정인이의 고통을 불러왔을 것이다.


서로 미루는 관행이 불러오는 불행의 단면은 우리 사회 깊숙이 박혀있다. 아무도 "성실한 책임"이라는 총대를 매지 않을 때 "불안"이라는 적은 우리 내부 깊숙이 침투한다. 특히 지금처럼 권한이 분산되어 있는 시스템 하에서는 언제든지 누구에게든지 불행이 발생할 개연성이 다.


생각해보면, 현재의 <여성범죄특별수사대> 같은 종합적이면서 전문적인 기구가 필요하다. <아동학대 관련 특별수사대>(가칭)를 만들어 지금의 아동보호 전문기관의 전문인력과 수사인력을 함께 두어 사건을 전담하게 만들면 된다. 이들에게 독자적인 조사권한과 수사권을 주고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 이 일이 과연 어려운가.


누군가의 사무적인 태도가 타인의 인생을 불행하게 바꿀 수 있다는 명제는 참이다. 반면 누군가의 비사무적인 태도나 성실한 열정이 타인의 인생을 불행하지 않게 바꿀 수 있다는 명제도 참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참인 명제는 늘 긍정의 공식으로 존재해야 하지만,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는 불행의 공식으로 남아있어 슬프다.



의심이 회의(懷疑)로 남을 때 우리 사회는 실패한다.


우리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하고서도 일상과 관행이라는 괴물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반복되는 분노와 슬픔은 왜 부끄러워하는 이들의 몫이 되었을까. 우리의 둔감성을 고발한다.


대중의 슬픔은 항상 시간 속에서 쉽게 피로해지고 곧 둔감해진다. 그냥 모르는 누군가의 불행에 그친다. 한편 우리의 둔감성은 평범한 일상을 지키는 힘일 수도 있겠다. 때문에 잠시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는 감정처리과정에서 타인의 불행은 휘발되고 만다. 누구에게나 당장 눈앞에 놓이지 않은 불행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지 못한다. 결국 타인의 불행과 고통을 소비하는 언론과 비슷한 수준에서 우리의 시선은 머무를 수밖에 없다.


약자들의 문제와 사회구조에 관한 병리적 문제의 처리는 한 사회의 수준을 평가하는 지표다. 성숙한 사회로 갈수록 이들에 대한 처리는 합리적인 개인들과 정비된 제도에 의해 뒷받침된다. 현대적인 사회구조에서는 약자들에 대한 문제 상황이 누군가에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만큼 사회는 개방적이고 보이지 않는 감시시스템을 본능적으로 갖추고 있다. 우리의 사회를 건전하고 안전하게 지켜주는 안전망들.


하지만 그런 안전망은 누군가의 작은 의문과 관찰에서 시작된다. 그런 의문과 의심이 문제제기로 이어지고, 그 문제가 시스템과 전문가들의 시선 속에서 즉시적으로 다루어질 때 불행의 가능성은 줄어든다. 그 문제의 가능성이 비록 1%일지라도. 그 1%의 가능성을 통해 정인이를 양부모와 즉시분리하고 따뜻한 쉼터를 마련해 주었더라면...


그렇지 않고 의심이 단지 회의(懷疑)로 남을 때 누군가의 불행은 현실화된다. 모든 문제는 여러 번의 경고와 징후를 보낸다. 거창하게 <하인리히의 법칙>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경험상 잘 알고 있다. 누군가 경종을 울리고 주어진 권한 속에서 책임 있는 행동을 할 때 의심은 비로소 회의를 벗어날 수 있다.

 

백만 번 말해도 변명에 불과할 수 있지만, 정인아 미안해... 가여운 어린 천사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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