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최근 5가지를 시도했다.] #03. 자기 합리화

by 굴러가유

나는 좋아하는 말보다, 싫어하는 말이 더 명확하다.
‘내일의 내가 하겠지’, ‘어떻게든 되겠지’ 같은 말들.

되게 책임감 없이, 남의 일처럼 툭 던지는 그 말.
그게 난 참 정이 없고 밉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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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자라왔다.
‘책임감의 아이콘’인 K-장녀.
그중에서도 나는 진짜 KKK장녀여서,
고작 하나뿐인 남동생이지만 가끔은 내 ‘자식’처럼 대하곤 했다.


언제나 양보하는 삶이었지만 배우고 싶은 건 다 하며 자랐다.
피아노 대신 바이올린, 오카리나, 미술, 마술, 공예까지.
하고 싶다고 하면 거의 다 시켜주셨다.


그런데 딱 하나.



결석은 절대 안 됐다.



아무리 아파도 엄마는 늘 “일단 가. 가서 조퇴해.”
그 단호함이 싫었다.
딸이 이렇게 아파하는데,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그 태도가
어린 나에겐 너무 서운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결국 ‘해야 하는 건 무조건 해야 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동시에 죄책감과 자기혐오에 시달리는 사람도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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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정도는 매일같이 해내야지 ' 하는 나를 향한 기준이 점점 높아지고

기준치까지 해내지 못하는 내가 점점 부족하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연기를 준비하면서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지도 5년 차가 되어간다.
가끔 결석 전화라도 오면 정말 당황스럽다.


- “아이가 자고 있어서요, 깨면 보낼게요.”
- “오늘 가족 외식이 있어서 다음 수업에 보낼게요.”


처음엔 이해가 안 됐다.


‘아니, 돈을 내고 다니는 학원이잖아...?’
나로선 절대 납득이 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니 조금 부러워지는 것 같다.



‘그래도 되는구나.’
‘빠져도 되는구나.’


사실 그렇게 빠지고, 해야 하는 걸 하지 않아도
누군가가 나를 크게 비난할 것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됐다.


나처럼 나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책임과 집착을 쥐어주는 사람에게는,
아마 ‘내일의 내가 하겠지’ 같은 말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요즘 나는 ‘자기 합리화’를 연습 중이다.


예전엔 듣기만 해도 싫었던 단어인데,
이제는 그게 내 멘털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산더미처럼 쌓인 죄책감 위에
조금씩 온도를 올려 녹이듯.


오늘 오디션을 넣지 못했더라도, 대신 운동하고 건강한 밥을 먹었어.
건강한 몸이 내일의 자양분이 되겠지.


가게 사정이 안 좋아서 알바를 그만두게 됐지만,
어쩌면 새로운 도약의 기회일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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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조금 다르게 중얼거려 본다.
“내일의 내가 하겠지.”

"어떻게든 되겠지."


이번엔 그 말이,
나를 미워하지 않게 도와주는 작은 주문이 되어주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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