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심과 막말 사이에 있는 소년의 자리

<소년이 온다>를 읽고

by 롤린스

학살과 저항.

활자마저 뜨겁다. 쏟아져 흘렀던 피와 켜켜이 쌓아놓고 불태워졌던 시체에서 뿜어진 연기로 가득했던 1980년 5월 광주는 그래서 뜨겁다. 영화 <화려한 휴가>와 <택시운전사>가 그랬듯이.


한강 작가는 다른 반대로 접근했다. 냉정한 문체로 80년 5월 광주를 조망한다. 절대 흥분하지 않는다. 천천히 그리고 샅샅이 하지만 싸늘하게 ‘소년’과 친구들, 가족에게 그날과 그 이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서술한다. 그래서 읽는 게 두려웠다. 무서웠다. 작가는 차디찬 활자로 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200페이지 남짓한 책을 수차례 끊어 읽었다.


장마다 화자가 다르다. ‘소년’이었다가 다음 장엔 ‘소년’의 엄마, 친구, 누나 등으로 바뀌어 나간다. 무채색에 가까운 서술은 마치 아무 일 아니란 듯 끔찍했던 30년 전 일을 회상한다. 지금 80년 광주를 바라보는 피해자와 유가족들의 심정을 대변한 것처럼. 무뎌지고 무뎌져 별일 아니었다는 듯이. 다 지나간 얘기란 듯이.


작가가 차가운 톤을 택한 이유는 우리가 관심 두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무관심 속에 광주는 한강 작가 속 광주처럼 차갑게 식어 갔다. 최근 들어 다시 군불을 지피는 사람들이 있다. ‘김대중이 주도한 폭동’이라느니 ‘북한군이 잠수함을 타고 남하해 개입한 사건’이라며 나불거리는 이들 때문에 차라리 무관심이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생각마저 들게 한다.

피해자와 유가족이 버젓이 살아계신대도 저들은 저런 말을 함부로 지껄이고 있다. 이분들이 다 세상을 떠나신 후에는 어떻게 될까. 위안부 피해자들을 대하는 일련의 망나니 짓거리들을 보면 얼추 미래가 보인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 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 p.134


“잊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날마다 만나는 모든 이들이 인간이란 것을.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선생도 인간입니다. 그리고 나 역시 인간입니다. (…)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 p.135


중고 서점에서 책을 샀다. 표지에 붙은 글귀를 보고 도저히 지나칠 수 없었다.


19.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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