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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연 Jun 08. 2021

남자 사람과 함께 사는 일

스무 번째 이사

지난 나의 보통의 날은 이런 식이다. 남자 친구와 집 앞에서 안녕, 잘 가. 굿바이 인사를 하고 나면 집에 와서 브래지어를 풀어헤친 다음, 잠옷으로 갈아입고 클렌징 워터로 화장을 싹 지운다. 머리에 브이라인 밴드를 칭칭 동여 멘 다음 책상 의자에 양반 다리로 앉아 엽기 떡볶이를 시켜서 아이패드로 '침착맨 이상형 월드컵 시리즈'*를 틀어놓고 소맥을 마신다. 그때 남자 친구의 카톡이 온다. "집에 잘 도착했어" 그러면 나는 엽떡에 소맥을 마시고 있다는 말은 생략한 채 "피곤하겠다. 얼른 씻고 자~" 태연하게 인사한다. 

결혼을 하고 신촌에서 강의하던 일이 마무리되지 않아 3달 동안 주말 부부를 했다. 결혼을 했지만, 몸은 여전히 감나무집에 있으니 유부녀가 되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남자 친구와 연애를 할 때보다도 부부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각자의 집으로 헤어지는 일이 더없이 애타고, 아련해졌다. 윗글에서 그렇게나 민철이와의 동거생활을 키보드에 땀이 나게 칭찬을 해놓고, 그렇게나 좋았다고 감나무집을 추억했지만... 다 모르겠고, 하루빨리 남편과 같이 살고 싶었다. 그래서 강의가 마무리되는 12월 31일부터 본격 새로운 남자 동거인과 생활을 시작했다. 아까워서 버리지 못했던 색이 바랜 속옷이나 티셔츠는 과감히 버렸고, 브이라인 밴드도 이젠 하지 않는다. (너무 추해서 못한다) 내 집에서 누가 봐도 정나미 떨어질 정도의 비주얼로 있지 않기로 하는 것, 그것이 요즘 남자 사람과 함께 살면서 지키고 싶은 나와의 약속이다. 하루 이틀 펜션에 놀러 가 함께 지내는 것이 아닌 진짜 매일매일 함께 사는 일. 어쩌면(?)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 받아들여야 할 일상, 숙명인 것이다.


나는 프리랜서라 집에서 일을 하고, 가끔 서울에서 미팅을 한다. 남편은  달에 두어  서울에 촬영을 하러 간다. 함께 서울로 가는 일정이 없는 대략 27일은 매일 24시간 함께 보낸다. 하지만 같이 하는 취미가 없어서 영화나 드라마  편을 보는  함께 무언가를 공유할 유일한 시간이다. 그래서 함께 공유할  있는 콘텐츠를 찾아보려고 싱글일  취미이자 힐링 타임  하나였던 자연 다큐멘터리를 틀었다. 남편은 5분남짓 보는가 싶더니 재미없다며  안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마저도 흥이 떨어져 버렸다.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남편은  달째 나에게 애니메이션을 보여준다. 나도 역시 재미가 없어서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길 6개월, 이제는 남편은 거실, 나는 안방에서 드라마를 보거나 각자 시간을 보낸다. 대신 하루에 1시간은 같이 텃밭을 가꾸고 나무들을 다듬거나 마당 청소를 함께 한다. 취미를 공유하는 것이 아닌 역할에 충실하기로 했다고나 할까. 남자와 함께 사는 일은 어쩐지 로맨틱하고, 핑크색 혹은 빨간색의 정렬일  같았는데 의외로 현실이었다. 물론 핑크빛, 정렬의 레드도 가끔은 존재하지만.


우리 둘 모두 출퇴근이 없는 탓에 신혼부부의 흔한 싸움의 원인인 가사 분담은 우리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신 문제가 된 건, 수면 습관이었다. 3개월을 거의 매일같이 싸웠다. 자야겠다고 생각하면 잠이 올 때까지 눈을 감고 있는 나에 비해, 남편은 눈이 감길 때까지 스마트폰을 켜놓는 습관이 있었다. 옆에서 스마트폰 소리가 자꾸 들리면 나도 모르게 집중을 하게 되고, 라디오처럼 듣게 된다. 남편은 그 소리를 백색소음처럼 들으며 잠이 들지만, 나는 오히려 잠이 깨버려 정신이 말짱해지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내가 상상한 결혼생활의 밤 풍경은 "잘 자 여보 오늘도 고생했어, 사랑해 쪽!"인데, 남편은 침대에 눕자마자 등을 돌리고 유튜브를 보는 것이 아닌가!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렇게 우리는 잠드는 습관이 맞춰질 때까지 3개월을 내리 싸웠다.


결혼기념일 촬영. INJE 2021


여러분은 내 운명이 하늘에 있다. 남편에게 달려 있다. 자식에게 달려 있다고 착각해서 남 타령만 합니다. 이게 종노릇이 아니고 뭔가요?
더 이상 방황하지 말고 행복과 불행이 모두 내 손안에 있다. 내 운명은 나에게 달려 있다. 내 마음에 있다. 이걸 안다면 종이 아닌 주인으로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_법륜스님의 [스님의 주례사]중 에서



원만한 합의점을 찾으면 좋겠지만, 우린 서로 절대 양보란 없었다. 남편은 유튜브를 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나 역시도 '유튜브 좀 꺼!'라는 말을 안 할 수가 없다. 결국 남편은 유튜브를 아주아주 조용하게 보며, 나는 적당히 포기하고 잠에 빠진다. 엽떡에 소맥도 편히 못 마시고, 한껏 못생긴 얼굴로 돌아다닐 수도 없으며, 방귀도 내 맘대로 뿡뿡 뀌어댈 수 없으니 이렇게 말하면 남자와 사는 일은 불편한 것만 투성이인 것만 같다. 그렇다면 '결혼은 자신을 버려야 하는 것인가요?'라고 물으면 또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결혼생활은 자신을 버리는 것이 아닌, 끊임없는 타인과의 타협이라고 느낀다. 싱글일 때에는 무조건 혼자 하는 게 좋으니까, 편하니까, 혼자가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이 불편함과 타협이 이젠 싫지 않다. 36년을 다르게 살아온 남자와 함께 살면서 서로 맞춰가는 일은 당연하고, 혼자 살때보다도 많이 편해진 생활환경을 문득 느낄 때면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이는 묘한 감정 롤러코스터 체험을 또 할 수 있는 특장점이 생긴다. 어른이 되고는 엄마에게도 부리지 못하는 어리광을 마음껏 부려도 나를 떠나지 않을 사람이 있다는 것이 좋고, 반대로 내가 한 사람을 챙기고, 위해주는 기분도 좋다. 감정 기복이 심한 탓에 같이 사는 남자 때문에 때때로 불행을 느끼고 기분이 바닥까지 추락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행복하고 대부분 편안하다. 사랑받고 있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싶을 만큼.


연애할 땐 그 사람이 좋았는데, 결혼하니 이 사람의 존재 자체가 좋다.

따로 살 때는 이 남자가 좋았는데, 결혼을 하니 나와 함께 사는 내 남자가 좋다.


결혼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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