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 인지되는 바로 "이 사람"
"니가 내 인생에 대해서 뭘 아는데요"
라고 따지다보니,
내 인생에 대해서
주저리 주저리 말하기 시작한 건
이쪽이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했다.
그 누구도 나에게
내 24시간에 걸린
내 31년의 인생에 걸렸던
몇 백 번의 버퍼링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았는데도,
술술 옹알이를 시작하고 있었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생일부터 시작해서, 학창 시절,
연애, 대학원은 왜 들어갔으며
어떠한 이유로 그만뒀는지,
왜 그렇게 죽고 싶었는지 등에 대한
질문을 듣지도 않았는데,
마치 토크 쇼에서 심오하게 누군가가
질문을 한 것 처럼,
혼자 내 "인생" 이라 장황하게 일컬을
이유만큼은 없는 그 프레임에
갇혀서는 막 말을 하기 시작하는데,
개인적으로 나조차 들어주기 버거운
이 진부한 스토리를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마치 미끼를 문 고기를 바라보듯
바라보면서 "내가" 라는 운을 띄우며
말을 시작하는데,
제발 좀 그만 하라고,,,,,
최대한 많은 대중을
감동시키고 싶다는
막연한 충동에 사로잡히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생각이 정립되었던
것은 아닌 방식으로,
그 막연한 충동과,
결코 만들어지지 않는 나만의 대중들과
타협을 할 만한 시점에
막막하게 도착해서
꽤 알아차린 것들이 있었다.
나를 읽을 줄 아는
어떤 사람들을 만난 그 시점으로 기억된다.
내가 막 장황하게
말도 안되는 말을 하면
묵묵히 들어주면서
내가 헤엄치는 그 물에서
내가 물에 빠지지는 않을지
지켜보고 있는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 순간
내가 만족시키려던 수많은 타인들이
물거품 처럼 사라지더니,
나는 그 이후로 뭔가를 "원한다"는
생각을 가진 적이 없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사람 곁에 있어야 하겠다는
막연한 확신밖에 가질 수 없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쩌면
막연하게
다수의 군중을 감동시키려고
하려는 충동은, 단 한번이라도
누군가가 나를 제대로 읽어준 적이
없던, 단 한번이라도 누군가도
제대로 내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준 경험이
없던 "이유"로 인해
초점이 지나치게 분산되어서인지도 모른다.
단 한 번.
바코드가 읽히는 것처럼,
내 위치와 그래왔던 길, 흘려왔던 눈물을
읽힘 당하는 사건.
그 이후에 사라지는 결핍은,
배가 부르면 배고플 수 없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지도 몰랐다.
실제로 이 사람 밖의 모든 사람은
내가 아닌 모든 가능성으로 남아 있다.
오히려 그들의 어떠함을 인지하려는 나의 의도가
나의 그들을 일시적으로 붙잡고 있는 지도 모른다.
타인에게
나를 읽게 하려는 것은 오히려
망상에 가까운 방식으로
그 망상을 그토록 원할 정도로 우리는
타인에게 읽히고 싶은 방식으로
프라이버시만큼은 잃고 싶지 않을 뿐이다.
대체 뭘 원하는지는
이제와서 따지기 너무 피곤하다.
엄마라는 직접적 타인도 지나치게 낯설어지고,
어제까지 낯설었던 타인은
내 전부를 가져버린다.
타인을 타인이라고만 일컫기에는
타인 속에 내가 너무 많다.
어쩌면 내가 투영할 만한 공간이 있는
개체를 "나의 타인"이라고 부르는 방식으로
우리는 나와 가장 비슷한 타인이라 일컬을 만한
또 다른 "나"를 찾으려는 방식으로
그 "나"에게서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싶은
충동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하는
운명을 안고 사는 지도 몰랐다.
내가 아닐 수 없는 나를
지나치게 혐오하는 방식으로
이 운명을 살아내는 게
유일한 이번 인생의 과제같이
느껴지는 오늘을
빨리 재워서
내일을 만나야겠다.
ㅎ ㅏ...
이런 날은 눈물이 마를 생각을
안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