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생각만으로도 그리운 공간들
가끔 나를 키운 공간들에 대해 생각한다.
대구 동산동의 작은 한옥 집. 머리를 뒤로 쪽 집은 할머니 뒤로 보이던 장독대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시멘트가 발려진 마당 한 구석에서, 나를 보에 들쳐 업고 쪼그려 앉아 손빨래를 하던 엄마 옆에 서 있던 낡은 청록색 세탁기도. 세살 쯤 되었을 때였는데, 가끔 그날의 이미지가 거짓말처럼 남아있다. 어린 나는 엄마의 등에 업혀 엄마가 주는 밥과 사랑을 먹고 자랐다.
남양주의 작은 뒷산. 아빠를 따라 동생이랑 빈 생수통을 쥐고 뒷산 약수터를 오르던 기억도 있다. 여름만 되면 뒷산 뒤에 계곡에서 물놀이를 했다는데, 그건 아빠의 기억에만 남아있다. 지금 돌아보면 뒷산도 아닌 낮은 동산이었는데, 유치원생인 나는 무슨 히말라야를 오르듯 숨을 몰아쉬었었지. 동산에서 한 주걱 퍼서 마시던 물은 시원했었다.
비릿한 골뱅이 냄새가 묻은 을지로. 내가 기억하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을지로에서 왔다. 그래서 여전히 을지로엔 좋아하는 것이 많지만, 그 중 으뜸은 명동에서 을지로로 이전한 평래옥이다. 예전엔 냉면을 먹고 김치말이 국수를 말아줬던 것 같은데, 지금은 없는 걸 보니 내 기억이 다른 기억과 합쳐진 게 아닐까 평래옥을 갈 때마다 생각한다. 아빠가 여기 냉면을 참 좋아했었는데. 나는 냉면 면과 국물만 마시고, 그 위의 야채는 싫어서 아빠 그릇으로 꼭 옮기곤 했었다.
계절이 담벼락을 타고 내리던 저동의 하굣길도 있다. 학교를 나서면 이어지는 서울 시립 미술관과 덕수궁 돌담길. 돌담길을 홀로 걷던 날들이 떠오른다. 궁 담벼락 밖으로 삐죽 삐져나온 벚꽃 나무를 바라보며 걷던, 뭐든 삐죽 거렸던 사춘기의 나. 흩날리던 벚꽃 비를 맞으며 첫사랑만 떠올렸던 날들. 영원히 그 애는 알 수 없는 부끄러운 기억들이 저동의 바람에 스며들어, 돌담길을 갈 때 마다 내게 얘기해준다. 야, 그 때 너 기억나냐.
공지천 위로 낯선 안개들이 자욱이 깔리던 춘천. 처음엔 유럽 시골 동네 같다고 생각했지만, 살면 살 수록 어딘가 분명하지도 않고 흐릿하기만 한 안개가 얄밉고 싫었었지. 내 이십대의 반이 새겨진 도시. 동아리 회식은 언제나 닭갈비였고, 시간만 나면 엄마랑 하늘과 천을 친구 삼아서 걷고 또 걷고 걸었던 날들.
가끔 나를 키운 공간들에 대해 생각한다. 엄마의 시간, 아빠의 인내, 동생의 장난. 그리고 언제나 나를 품었던 도시의 풍경까지. 살았던 동네들을 돌아보면, 동네에서 함께 지낸 좋아했던 사람들도 함께 떠오른다. 이젠 영영 돌아갈 수 없는 날들이지만, 그리운 공간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는 안전해지는 것 같다. 언제든 마음으로 돌아갈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를 버틸 힘이 생기는 듯 하고.
좋았던 기억에는 힘이 있다. 비록 살면서 많은 부분을 잃어버렸지만, 좋았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오늘의 나는 잠시 웃을 수 있다. 나의 그리운 동네들, 그리운 풍경들. 가을 바람을 맞으니 다시금 떠오르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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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민│淸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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