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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민 Sep 29. 2020

스위트 스폿(Sweetspot)

#29. 3년 전, 겨울에 쓴 이야기

* 3년 전, 이맘때 쓴 글을 발견했습니다. 취준생이었고, 아르바이트생이었고, 희미하지만 분명한 꿈이 있었던 스물일곱의 기록입니다. 옛 하드를 정리하다 발견했습니다.



단발로 머리를 자르고 싶은 욕구를 겨우 참고 있었는데, <당신이 잠든 사이에> 수지 단발을 보고 봉인 해제되었다. 새벽 늦게까지 드라마를 보고 다음날 아침 홀리듯 미용실을 찾았다만, 뭔가 불안했다. 지금껏 했던 단발머리는 죄다 실패였기 때문. 내가 의지하는 거라곤 ‘단발만 8년 차’라는 디자이너의 소개말 때문이었다. 8년 차라는 숫자에서 오는 신뢰도 때문인지, 아님 타이트한 옷을 입는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맨투맨을 입은 다름 때문인지, 왠지 모르게 신뢰가 갔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태어나 그렇게 빠르고 정확한 가위질은 처음 보았다. 순식간에 길고 상했던 머리칼이 차분히 정돈되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가위질을 보면서, 전문가는 전문가구나 싶었다. 그렇게 완성된 인생 단발머리. 단발머리만 하면 못생겼다고 놀리던 동생까지도 이번 단발은 정말 잘 어울린다고 했다. 처음 본 사람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머리를 상상하고 재현하는 8년의 경력을 위해, 디자이너는 얼마나 많은 가위질을 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잘 정돈된 머리를 보며, 얼마 전 라디오에서 들은 스위트 스폿(sweetspot) 이야기가 떠올랐다. 스위트 스폿은 배트가 야구공을 맞히는 최적의 지점이라고 한다. 날아오는 야구공과 배트의 타이밍이 딱 맞아떨어져야 홈런을 칠 수 있다고. 해설자는 스위트 스폿을 반복해서 설명하다가 자신의 감정에 못겼는지, 목소리까지 덜덜 떨며 말했다. ‘그래서 이승엽 선수가 대단한 거예요. 그의 624개 홈런 기록을 보면, 그가 얼마나 연습했는지 알 수 있죠. 홈런 624개.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기록이 아니다 이겁니다!’



2016년의 기록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한 분야’를 정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이제껏 뭔가를 미친 듯 좋아해 본 경험도, 한 가지를 꾸준히 해 본 경험도 없었다. 7살 땐 피아노가 치고 싶다고 졸라 아빠 노트북 살 돈으로 피아노를 샀지만 피아노 사랑은 얼마 가지 못했고, 초등학교 6학년 땐 사물놀이에 빠져 선생님이 장구를 쭉 해서 대학까지 가자고 했지만 사춘기에 그만 뒀다. 중학교 3학년 때 장구 반 친구들의 웅장한 공연을 보면서, 중간에 포기한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나의 의지는 매해 12월 마지막 날에 쓰는 새해 다짐 같았다. 이루지 못한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매년 작성하는 것. 그래서일까.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알고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은 신에게 선택받은 존재가 아닌가 싶었다.


내겐 아빠가 그런 사람이었다. 직업인으로서의 아빠는 내게 이승엽 선수처럼 멀고 아득한 존재이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일찍 깨달은 선택받은 사람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잘 할 뿐 아니라, 주변 이들에게 인정 받는 아빠를 보면, 낯설고 부러웠다. 좋아하는 '뭔가'가 있다는 것도, 한 가지를 오랜 사랑할 수 있다는 것도. 단발로 머리를 싹둑 자르고 온 날, 머리를 자랑하고 취준생의 복잡한 마음도 털어놓을 겸 서재에서 책을 읽는 아빠에게 말을 걸었다. 아빠는 어떻게 아빠만의 스위트 스폿을 찾았냐고.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무언가를 꾸준히 한다는 거, 말은 쉽지만 행동은 어렵지. 아주 긴 시간 홀로 싸워야 하는 일이거든.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나는 목숨을 걸 만큼 책을 읽고 공부했어. 그리고 여전히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에게 물어봐. 오늘 세상을 떠나도, 후회가 없는가 하고.'


나는 그 말이 100개 쳐서 안 되면 200개를 치라던 이승엽 선수의 명언이나 화려하게 커트를 하던 디자이너 선생님의 가위질보다 더 강력히 마음에 와 닿았다. 그들은 내 삶에서 먼-그러니까 위인전에서나 볼 것 같이 아주 먼- 사람들이었지만, 아빠의 삶은 내가 평생을 거쳐 목격한 삶이었으므로.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나의 모든 것을 걸어보라는 말, 말은 쉽지만 행동은 어렵다는 말. 어렸을 때부터 들어왔던 말인데, 그 말이 그날따라 유난스럽게 크게 다가왔다. 아마 스물일곱 해를 살아, 이제야 겨우 조금 잘하고 싶은 게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잘 써보고 싶다. 이 작은 꿈을 좇다 보면, 언젠가 나의 스위트 스폿을 찾아 홈런을 칠 수 있는 날이 올까. 624개의 홈런은 바라지도 않는다. 딱 하나의 홈런. 하늘 끝까지 홈런을 던지고, 남들처럼 취업을 하지 못한 지금의 시간을 돌아보며 웃는 날이 내게도 올까.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하나도 없지만, 그때까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딱 두 가지 일 것이다. 산뜻하게 머리를 자르고 돌아온 그날 밤, 책상에 앉아 새 노트를 꺼내 맨 앞장에 이렇게 썼다. 아주 작은 꿈이라도 꿈꾼다면 포기하지 말 것. 그리고 목숨을 걸어볼 것.







* 100일 매일 쓰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입니다. 해당 원고는 초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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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민│淸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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