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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마언니 Mar 17. 2020

'맥시멈 리스트'가 아니었다면 어쩔 뻔했어!

이탈리아에서 코로나바이러스를 견뎌낼 수 있는 이유  





- 미니멀 라이프는 먹는 거가?

"찬장 좀 비우고 싶다 진심"

- 버려라, 다 몬쓴다

"그럴 수는 없고..."


새해 아침 한국에 있는  여동생과 주고받았던 메시지 내용이었다.

매 해 새해가 시작되면 여러 가지 새해 소망(?) 계획(?)을 다짐한다.

하지만 막상 연말이 되면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둔 건 크게 없었다.

스스로를 인지하기 시작하면서 어느덧 새해 계획은 내 계획엔 더는 없었건만,

올해는 나도 해보자!  '미니멀 라이프' 강한 의지가 생겼다.


결혼 9년 차, 이탈리아 이방인 생활 10년 차

이탈리아에는 전셋집의 개념은 없다. 자가 아니면 월세이다

월세집 중에서도 가구는 물론 식기류까지 모든 게 완비되어있는 그야말로 풀옵션 같은 집이 있는가 하면,

아무것도 없다 없다 심지어 전구조차 없이 전기배선만 빼꼼 나와있는 어디선가 들어온 적 있는 한국의 마이너스 옵션 같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살아야 하는 집도 수두룩하다.  



신혼시절 남편과 단출하게 둘만 살 때엔 풀옵션까진 아니었지만 절반의 편의용품 (붙박이 장, 텔레비전, 세탁기) 정도는 구비되어있는 집이었다. 아무리 신혼이라 한 들 기존의 집 안 분위기를 장악하고 있는 가구 속에 쉽게 내 스타일의 가구를 들여놓기란 그 조화의 불균형이 꽤 거슬렸었다.

반면 이사할 땐 큰 가구가 없으니 거대하게 이삿짐이라 할 만한 것 또한 없더라


절반의 내 것과 절반이 내 것 아닌 집에서 3년을 지냈더니 은근 스트레스였던 지 새롭게 이사한 집은 포크, 숟가락까지도 직접 구비해야 하는 Senza (쎈짜: 이탈리아어로 없다/ 즉 아무런 가구가 없는 집을 뜻한다)였다.

인테리어 공사를 막 끝낸 새로운 집, 내 마음대로 내 스타일대로 구입하는 가전과 가구, 주방용품까지 그제야 진짜 신혼 같고 제대로 신이 났었다.


정확히 4년을 살았다.

이탈리아 월세 계약은 보편적으로 4+4이다.

4년을 기본 계약으로 하고 연장할 시 4년을 더 한다.  

성인 2인이 살기엔 부족함이 없는 집이지만 임신 8개월, 곧 태어날 아이와 함께 하기엔 복층구조의 집은 그다지 안전하다고 생각되지 않아 이사 하기를 결정하고 몇 차례 집을 보러 다녔지만 마음에 쏙 드는 집을 만나지 못해 연장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건너편 빌라 1층이 이사계획인데 관심 있냐는 주인 할머니의 제안이 반가웠다.



앞뒤의 꽤 넓은 테라스와 작은 정원, 마당까지 있는 아이를 키우기에 적합한 집.

이미 4년을 알고 지낸 집주인이었고 할머니의 아들이 직접 지은 집으로 집 안팎의 보수공사까지 항상 불편함 없이 챙겨주니 만족스러웠다. 이사를 결정하고 새로이 계약서를 작성했다.


100걸음 안팎의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지만 이사는 완벽하게 이사 다.

당시 나는 임신 8개월이었고 6월의 로마는 꽤 뜨거웠다.   

단지 내에서의 이사이기에 이삿짐 차량을 부를 수도 없고 인부를 부르기에도 뭔가 애매한 이삿짐

우여곡절 끝에 뜨겁던 여름, 임신 8개월의 배불뚝이와 남편은 그렇게 이사를 끝마쳤다.

4년 동안 내가 집 안으로 들여 논 물품은 상상보다 어마했다.

이사 명목으로 비우고 또 비웠어도 '미니멀'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맥시멈'이었다


어쩌면 그날의 이사 이후 속마음 한편엔 '미니멀'이라는 작은 소망이 자리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천성이 '맥시멈'인지 늘 뭘 그렇게 사고 쟁이고 반복했다.


어느덧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육아용품까지 더하니 알까기라도 하 듯 노상 불어났고 '아이들이 있는 집인데, 만약에,,,'라는 어디서부터 작용하는지 알 수 없는 불안심리로 조금씩 조금씩 더 쟁이는 나를 발견하고는 스스로가 너무 싫은 거다

구석구석 포진되어 포화상태인 찬장도 더는 용납하기가 싫었다.




진짜 한 번 해보자! 미니멀 라이프!

 

9년째 나를 겪은 남편은 '미니멀'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코웃음 쳤다.

25년 이상 나와 함께 살았던 여동생 조차 실사용하여 소진하는 비움은 어려울 테니 정 원한다면 다 버리고 시작해보라고 한다.

'어떻게 버려'


차마 내 손으로 버리지는 못하고 쟁임을 최소화하는 것부터 시작하자는 작은 기준점을 만들었다.

장을 볼 때도 불안심리를 조금 내려두고 최소한으로 보려고 꽤 신경 쓰며 노력했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생각조차 못했던 복병이 나타났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했다


이탈리아의 코로나바이러스는 심각 수준이다.

외출금지령이 내려졌고 마트는 사재기로 텅 비워졌다

전 이탈리아가 사재기를 하고 있다, 역시 내게 미니멀은 애초부터 안 될 일이었나 보다



타고 난 '맥시멈 리스트' 답게 마트 카트가 제대로 끌리지도 않을 만큼 장을 봤다.

이미 포화상태인 냉장고, 찬장 속에 넣고 또 넣었다.


외출금지령 이후 실제 단 한 번의 외출 없이 집에서만 생활한다

지금 당장 하고픈 게 무어냐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밖에 나가서 따끈한 카푸치노 한 잔 꼭 먹고 싶다고 할 만큼 이탈리아 커피가 무진장 그립다.

커피를 꽤 좋아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집에 그 흔한 커피 캡슐 기계 하나 없는 건 여기는 커피의 본고장 이탈리아 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캡슐커피 기계 하나 살까 봐"

-집에 기계 있다고 나가서 커피 안 사 마실 것 같니? 그냥 나가서 먹어, 집 밖만 나서면 죄 커피집인데 뭘 사


캡슐커피 기계 사겠다고 할 때마다 남편은 나가서 먹자고 했고 꽤 인정하는 부분이기에 여태 구비하지 못했다.

한국 휴가를 다녀올 때면 믹스커피는 빼놓지 않고 꼭 가져온다. (로마에서도 요즘은 믹스커피를 구할 수 있지만 몇 해 전만 해도 믹스커피 구하기가 어려워 한국 휴가길에 꼭 가져오는 필수품이었다)

평소엔 100개짜리 한 박스를 가져오건만 올해는 희한하게 280개짜리 박스를 가져왔다

 

늘 불만이던 찬장 속의 아이템들이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꽤 절실하게 비움을 원하긴 했지만,   

차마 버리고 시작할 수는 없었던, 하지만 속 시원하게 한 번 싹 버리지 않으면 결코 이루지도 못할 것 같던 소망 같던 '미니멀'이 예상치도 못한 이런 역병으로 인하여 강제 외출금지로 인하여 이루어지길 원했던 건 결코 아니었다. 

'뭘 또 이렇게 극단적이게 소망을 이뤄주고 그러는지"


이탈리아 전역을, 아니 전 세계를 덮친 때아닌 코로나바이러스의 습격에도 거뜬히 견딜 수 있는 힘!


'맥시멈 리스트'가 아니었다면 어쩔 뻔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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