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 이루고자 하는 어떤 목표를 위해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갈 때가 있다. 또는 성공을 위해 경마장의 경주마처럼 양쪽 눈이 가리어진 것처럼 앞만 보고 달릴 때가 있다. 사람의 몸은 특별하게도 밸런스가 무너지면 우리 몸에서는 경고 신호를 보낼 때가 있다. 눈이 벌겋게 충혈된다든지, 입술이나 혓바닥이 돋는 다든지, 면역력이 약해져서 감기 몸살을 심하게 앓는 경우가 있다. 아니면 마음이 우울해진다든지,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만 보일 때가 있다. 몸이, 마음이 우리에게 보내는 이상신호인 것이다.
우리 몸에서 보내는 이상 신호를 자연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순간 잠시 멈춤이 필요할 때가 있다. 하지만 어떤 목표를 위해 달려가는 과정에서 그 몸이나 마음의 경고 신호를 받아들이고 멈추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심하면 갑자기 쓰러진다든지 또는 더 무리를 하면 영영 못 일어날 수도 있다. 다행히 대부분의 지혜로운 사람들은 우리 몸의 이상 신호를 순순히 받아들이면서 잠시 쉬었다가는 길을 택하게 된다. 계속 무리를 해서 달려가는 것보단 열심히 하고 있는 일이나 추진하는 프로젝트에서 잠깐의 창조적인 멈춤은 더욱 효율적일 수도 있다. 재충전은 우리에게 더 좋은 아이디어나 지혜로운 솔루션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휴식과 멈춤에도 적절한 타이밍이 있다. 조금만 더 , 조금만 더 하고 무작정 달려갈 일이 아니다. 항상 우리의 몸이나 마음이 보내는 경고 신호에 주의를 기울이며 생활할 필요가 있다. 냄비의 물이 백도에서 끓는 것처럼 그 타이밍을 놓치면 순간의 차이로 열 배, 백배의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일을 하는 노동자든 고용주든 모두에게 적용된다. 빨리빨리 문화는 삼풍백화점, 성수대교의 안타까운 기억과 함께 사라져야 할 때가 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 이제 더 이상 남과 북 모두 속도전이 우리의 자랑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삶은 세월과 함께 진화되었고 세상은 더욱더 복잡 다단해졌기 때문이다. 양(Quantity)에서 질(Quality)로, 그리고 지금은 격(Class)이 중요한 시대로 변했다. 시계처럼 빨리만 가는 시간의 속도보다는 나침반처럼 올바른 방향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예기치 못한 국가적 재난 현장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또는 빡빡한 일정의 기간이 주어진 프로젝트에서라면 말처럼 잠시 쉬었다 간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매번 국가적 재난의 복구나 수습과정에서 잠시도 그 책임을 내려놓지 못하고 일을 하다가 그 어느 누구도 그렇게 되길 바라지 않았으며, 그 어느 누구도 그렇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는 불행한 일을 당하는 안타까운 경우를 경험하게 된다. 이젠 우리도 어떠한 경우에서라도 생명의 안전을 위해 우선적으로 조치하고 노력해야 한다. 그 어떤 삶도 그냥 무방비 상태로 내버려 두어선 안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경험은 단지 극복할 수 있는 고통일 뿐, 죽음은 아닌 것이다.
“만약 신이 우리로 하여금 고통 없이 살도록 만들었다면, 우리는 그저 꼭두각시에 불과해서 그가 줄을 당기는 대로 끌려가며 살았을 거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행사할 힘이 전혀 없게 되는 거지. 그랬으면 우리는 아마 고통이나 역경을 겪지 않아도 됐을지 몰라. 그렇지만 고통과 역경을 제대로 모르고는 인생을 사는 기쁨이나 역경을 이겨내고 느끼는 승리감은 결코 맛보지 못했을 거야. 또 우리가 사는 의미나 목적을 찾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을 거고. 그렇다면 우리는 그저 계획된 대로 움직이는 로봇에 지나지 않겠지. 신은 적어도 우리가 그보다 더 낫기를 원하신 거야. 그래서 우리에게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의지를 주신 거지. 신은 우리에게 인생을 주셨고, 그 인생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까지 주셨어. 다시 말해서, 인생을 우리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신 거야.”
할 어반, ‘인생의 목적’ 중에서
한편 우리의 몸이 고통에 놓이게 될 때, 또는 우리의 영혼이 상처를 입었을 때 즉 삶의 일시적인 멈춤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과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다. 누군가가 잘 나갈 때는 그가 일부러 시간을 내서 소식을 전하거나 만남을 갖게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만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지만, 스스로도 자기 자신과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 주변의 잘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연락이 없다고 서운해할 필요가 없다. 시간이 지나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반드시 연락이 온다. 언젠가는 그가 스스로 고통스럽고 힘들고 지칠 땐 가족이든 친구든 누구든 가장 편안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찾게 되어 있다. 그리고 위로받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동안의 서운했던 마음을 굳이 표현할 필요는 없다. 계속 가져갈 수밖에 없는 인연이라면 오히려 넓은 마음으로 위로해주고 받아주어야 좋은 관계는 지속될 수 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삶에서 겪게 되는 인지상정이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고은 시집 ‘순간의 꽃’ 중에서
작은 고통은 우리를 화나게 할 뿐이지만, 오히려 큰 고통은 우리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게 한다. 아마도 그런 고통이나 상처가 없었다면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앞만 보고 달려가다가 결국에는 막다른 길에서 충돌하고야 말 것이다. 육체의 고통과 영혼의 상처는 우리를 더욱 겸손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과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또한 우리 삶의 깊이와 넓이를 확장해 주고 올바른 삶의 태도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고마운 역할을 한다. 물론 우리의 삶에서 그 고통과 상처를 인내하며 슬기롭게 극복했을 때를 전제로 함은 당연하다. 그 고통과 상처로부터 힘들었지만 지혜로운 극복에 대한 보상과 함께, 또 살아갈 힘과 용기와 경험을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