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대에게
신문에 따르면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된 미국 시인 루이스 글릭이 노벨위원회의 인터뷰 요청에 그녀가 보인 첫 반응이라고 한다. “여긴 겨우 아침 7시밖에 안 됐는데 계속 전화가 울려 혼란스럽다"며 커피를 마셔야 하니 짧게 끝내 달라고 부탁했단다. 글릭은 노벨문학상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질문에 "모르겠다"라고 운을 떼며 "처음 든 생각은 '이제 친구가 없어지겠네'였다"라고 말하고, 그렇게 생각한 이유에 대해선 "친구들이 대부분 작가들이기 때문"이라고 부연했다고 한다.
그리고, 사실 지금 살고 있는 집 말고 버몬트에 있는 다른 집을 사고 싶었는데 '그래, 이제 새 집을 살 수 있게 됐다'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하면서 또 "지금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내는 일상을 지키는 것이다. 지금도 계속 전화가 울려댄다"며 당황스러운 심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시인 루이스 글릭이 노벨문학상 수상의 그 엄청난 영광의 순간에서도 그녀가 지키고자 했던 그 평범한 일상, 가을 햇볕 좋은 날 문득 산으로 들로 바로 떠날 수 있는 것, 안온한 휴일 오후에 집 밑 카페에 내려가서 금방 추출한 커피 향 찐한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브런치를 위해 노트북을 켤 수 있는 것, 문득 날아온 단체 카톡 메시지를 보고 가까운 친구나 후배들과 대여섯 명이 만날 약속을 할 수 있는 것, 외출 시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마스크를 쓰고 손세정제를 바르지 않고도 크게 숨 쉴 수 있는, 우리도 그런 매일의 평범한 일상이 그립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예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매일의 평화로운 일상을 즐길 수 있었던 것, 아니 그런 평범한 일상은 즐기는 것이 아닌 당연한 것이었던, 그때가 삶의 행복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물론 지금도 마스크만 쓰면 대부분의 그런 일상은 누릴 수 있지만 그래도 무언가 코로나 이전의 일상은 사라지고 우리들은 각각의 얼굴의 반은 마스크로 가리고 있다. 우리가 내쉬는 날숨과 들숨은 마스크 안에서 나의 소리와 함께 맴도는 그런 일상 조차도, 그동안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의 현재 상황에 비하면 감사해야 하는 일상일 뿐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도 그런 평범한 매일의 일상에서 위로받고 치유된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세수하고 밥 먹고 일하고, 그리고 일정한 시간에 집에 돌아와서 저녁 먹고 쉬고 잠드는 그런 평범한 매일의 일상을 지킬 때, 우리는 맑은 정신과 힘과 휴식을 얻으며 몸과 마음을 재충전할 수 있다.
지금까지 표현한 그 하루의 일상이 무너져 내리면 우리도 같이 무너져 내릴 수 있다. 아무리 힘들고 지칠 때라도 제때 자고 제때 일어나며 제때 씻고 제때 밥 먹어야 우리는 무너지지 않는다. 그런 우리의 매일의 평범한 일상을 책임지고 수고하는 사람이 바로 아내들이고 주부들이다.
가끔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큰 일을 당한 주인공이 제때에 밥을 먹이려는 주변 사람들에 의해 억지로 밥숟갈을 떠면서 어떻게 이런 큰 일을 겪고도 스스로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밥을 넘기고 있는지, 눈물은 내려오고 밥숟갈은 올라간다면서 자신을 한탄한다.
한두 끼는 거를 수 있을지라도 그 주인공처럼 결국에는 일상의 아침이나 저녁처럼 제때 밥을 먹어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어느 누구도 그런 눈물겨운 순간을 비난하지 않을뿐더러 비난해서도 안된다. 그것이 우리를 힘나게 하고 살아가게 하는 우리의 소중한 일상이니까.
내가 어떠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아는가.
절망이 무엇인지 안다면 당신은
분명 겨울의 의미를 이해할 것이다.
나 자신이 살아남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었다,
대지가 나를 내리눌렀기에.
내가 다시 깨어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축축한 흙 속에서 내 몸이
다시 반응하는 걸 느끼리라고는.
그토록 긴 시간이 흐른 후
가장 이른 봄의
차가운 빛 속에서
다시 자신을 여는 법을
기억해 내면서.
나는 지금 두려운가.
그렇다, 하지만
당신과 함께 다시 외친다.
'좋아, 기쁨에 모험을 걸자.'
새로운 세상의 살을 에는 바람 속에서.
루이스 글릭의 ‘눈풀꽃’(류시화 옮김)
겨울, 봄, 여름이 지나고 어느덧 가을이 되었다. 이제는 한 번쯤은 제대로 표현해야 한다. 코로나 시대에 가족의 대부분이 매일의 일상을 집에서 보내고 있다. 재택근무, 순환 군무, 인터넷 강의 등 모두가 매일의 일상을 집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다반사일 것이다.
우리를 무너지지 않게 하는 이 위대한 매일의 일상을 책임지고 있는 아내에게, 엄마에게 더 늦기 전에 쑥스러움을 이겨내고 고백해야 한다.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따뜻한 체온이 담긴 말 한마디를, 그리고 저녁 식탁 위에는 활짝 핀 가을 국화꽃을 올려놓아 보자.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는 말했다. 맨날 하던 짓 말고, 안 하던 짓을 해야지 세월이 늦게 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