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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Aug 03. 2023

새가 울고 꽃이 피는데 무슨 목적이 있겠는가

목적


 무더위를 잊기 위해 남극횡단탐험대의 이야기를 다룬 ‘새클턴의 위대한 항해’(뜨인돌)란 책을 주문해서 읽고 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남부군’(두레)을 읽고 혹한의 지리산을 전깃줄로 동여맨 검정고무신을 신고 거의 매일 20km 전후의 산속을 행군하며 멧돼지처럼 생활했던 세계 빨치산(partiszan, 러시아어) 역사에 유례가 없는 남부군의 이야기를 읽고 여름 무더위 속에서 한겨울을 살았기 때문이다.



 유월과 칠월의 한국전쟁과 휴전 협정에 관한 특집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은 그들의 투쟁에 지적 호기심이 발동했다. 물론 오래전 회사에서 영화동호회를 맡았을 때 처음 함께 본 영화가 ‘남부군(1990, 정지영감독)이었다. 그 당시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작가의 생생한 이야기가 사회적 화제가 되면서 50만 부가 넘게 팔리기도 했었다.



 아내의 생활철학에 따라 우리 집 시스템 에어컨은 장식용이 된 지 오래고, 소리 없이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을 쏘이면서 추운 겨울 이야기가 담긴 책을 읽고 싶었다. 영화로만 보았던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을 읽고 싶었지만 먼저 읽은 아내의 말에 의하면 전 10권에 달하는 그 책을 읽기 시작하는 순간, 무더운 여름에 폐인이 될 수 있다는 충고를 흘려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Bullet men, 김지현


 좌우의 특별한 이념적 갈등이나 역사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해 그런 책을 읽지 않는다. 지식을 얻고 교양을 쌓는다던가, 자기 계발을 위한 목적으로 책을 읽지 않는다. 그냥 호기심이나 궁금하면 읽는다. 어떤 목적을 위해 책을 읽거나 클래식 음악을 듣지 않는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하고,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는 삶, 특별한 목적이 없는 지금의 예측 가능한 삶이 너무 좋다.



"누구에게나 삶이 시가 되던 시절이 있다. 지금이라고 왜 없겠는가. 눈은 멀고 몸은 녹슬어 영혼이 지쳐있을 뿐. 갈망이나 그리움, 사랑이라든가 목숨 바칠 만한 어떤 것, 그런 것들이 있었던 때는 행복했던가. 모든 것이 장밋빛 인생이었던 시절, 장밋빛 인생이라고 화려하기만 했던가. 장미의 난만은 때로 얼마나 크나큰 아픔인가. 새가 울고 꽃이 피고 열매 맺는 데, 무슨 목적이 있겠는가. 그냥 피고 지고 할 뿐. 허나 사랑 없이 새가 울고, 꽃이 피고 지고 하겠는가 “


박일문의 소설, ‘살아남은 자의 슬픔’중에서



 90년대 초, 매일매일 반복되는 야근과 특근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힘든 사회생활을 하며 좁은 아파트 베란다에서 읽었던 소설이다. 독일 희곡 작가이자 연출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집 제목을 딴 소설 속의 한 구절이다.


 누군가는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일상이 지겹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루틴하고 예측가능한 일상을 누리기 위해 그동안 치열하게 생활해 왔다. 자신의 꿈을, 인생의 목표를 이루었다고 해서 삶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살아있는 한 우리의 삶은 계속된다.


대관령여름음악제, 2023


 매일 아침, 알람소리를 듣고 일어나 바쁘게 회사에 출근하고, 여기저기서 나를 찾는 사람들과 함께 부대끼며 열심히 일하고, 야근이나 특근, 또는 저녁 비즈니스 모임을 마치고 귀가하는 반복되는 삶 속에서도 늘 예측불가능한 일이 일어났고, 그 문제해결을 위해 매일 머리를 싸매곤 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새벽에 앰뷸런스를 타고 병원 응급실에 실려가는 혼수상태의 순간, 이렇게 루저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지금은 아침시간을 즐긴다. FM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시고 내가 그날 그날 하고 싶은 일들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다. 매일매일이 예측 가능한 루틴이 있는 지금의 삶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곧 내 삶의 목적이었다. 지금 이 순간, 예측할 수 없었던 불행에 던져진 모든 사람들이 제일 그리워하는 삶이 매일 반복되는 소소한 일상임을 잊지 말아야 삶에 감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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