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 팔자도 드센 축에 끼나요
아부지는 주인집에 때때로 전화를 걸어서
어, 그래. 부쳐준 돈은 잘 받았다.
어, 그래. 서울놈들 조심하고,
어, 그래. 그 동네 맨날 데모한다카든데
절대 빨갱이 짓거리 하고 다니지 말그래이
촌구석에서도 뭐 들은 게 있는 건지, 저 세 마디하고는 딱 끊어버리더래요. 참 웃기죠? 언니는 서울놈을 조심하지 못했고, 동생은 빨갱이 짓거리를 하고 다녔으니 말이죠.
동생을 데리러 간 그날, 소녀는 야학 선생님이라며 스스로를 소개하는 한 남자를 보고는 갑자기 심장이 두근두근,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그런 경험은 난생처음이었는데요. 뻔한 전개지만 둘은 첫눈에 반해버렸고, 소녀는 정말 너무 서울 남자 '한 번'만 만나서 찐하게 연애를 해버렸지 뭐예요.
고생이 체질인 사람이 누가 있겠냐만은 특히 소녀는 정말 고생스러움을 너무너무 싫어했어요. 고향에서도 온갖 집안일은 어무이와 언니가 다 했다시피 했고, 언니가 시집간 뒤로는 손이 야무진 셋째가 웬만한 건 다 했거든요. 소녀는 상경해서도 웬만하면 동생이 차려준 밥을 먹고 가끔 설거지나 해봤을까요.
서울에 있는 대학교를 다니며 다정한 서울말을 쓰는 스윗남이라니. 남자라곤 아부지랑 막냇동생, 고향에서 잠시 관식이 흉내를 냈던 이웃집 소년 말고는 몰랐던 소녀. '이런 남자가 왜 나를?'이라는 자격지심과 '이 남자라면 나를!'이라는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며 달콤한 미래를 상상했답니다.
평생 너만을 사랑하겠다는 달콤한 확신의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을 맡겨 버린 철부지 소녀. 소녀는 크리스마스라는, 고향에서는 듣도보도 못한 로맨틱한 분위기에 취해 노동운동을 한다던 야학 선생님과 하룻밤을 보냈고, 그 하룻밤은 소녀의 인생에 선물단지인지 애물단지인지 하나를 남겨두고 말았죠.
(이어지는 이야기는 너무 아침드라마 같아서 디테일은 패스할게요. 웬 여자가 찾아와 '니가 우리 잘난 아들 앞길 막는 년이냐' 돈봉투 던져 놓고, 남자는 유학 가버리고 뭐 그런 쉰내 나는 얘기예요.)
박사 사모님이 될 줄 알았던 소녀는 한순간에, 곧 미혼모를 앞둔 임산부가 돼 버리고 말았죠. 유학 가기 전, 남자를 만날 엄두조차 내지 못한 소녀를 대신해 소녀의 동생이 남자를 찾았지만, 돌아온 것은
정말 미안해. 유학만 갔다 오면 어떻게든 책임질게
라는 책임 없는 한마디뿐. 소녀의 동생은 먼 훗날
그때 그 새끼 뺨따귀라도 후려갈길 걸
후회했지만 무슨 소용 있겠어요. 고생 체질이 아니었던 소녀는 몸이 무거운 데다 입덧이 심해 도저히 일을 할 수도 없는 처지. 당장 고향으로 돌아오라며 그 새끼 아가리(사실은 좀 더 은밀한 부위 ;))를 찢어놓겠다는 아부지를 겨우겨우 진정시켜 놓고, 아직 진이 오빠를 만나지 못해 돌아갈 수 없다는 실없는 소리를 하며 소녀는 동생과 서울에 남기로 했어요. 아이를 촌에서 키우고 싶진 않았거든요.
덜컥 공장도 관둬 버렸기에, 생계는 빨갱이 짓거리 멈추고 정신 차린 소녀의 동생에게 맡겼지요. 사글셋방 한 칸을 세 식구의 보금자리로 준비하며 그렇게 자매는 본격적인 서울살이를 시작했어요.
크리스마스로부터 정확히 열 달이 지난날, 어무이와 동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소녀는 한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낳았어요. 어무이가 여섯 번만에 성공했던, 아들을 단번에 낳았지요. 아이는 생각보다 영특했어요. 어쩌면 이렇게 체질에 안 맞는 고생길을 이 아이 덕분에 면할 수도 있으려나 싶었죠.
그 새끼가 괜히 명문대생이 아니었어
아이가 아들이라는 소문이 어떻게 들어갔는지 아이가 네 살이 되던 해, 돈봉투를 던졌던 남자의 엄마가 느닷없이 찾아와 '씨를 찾겠다, 대를 이어야 한다'며 헛소리를 시전했지만 저런... 소녀는 찍소리 한 마디도 못하고 동생 뒤에 숨어버렸네요.
하지만 이미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맛을 모두 경험한 소녀의 동생은 전사가 되어 있었죠. 지독한 공장장을 몇 명이나 상대해 봤는데, 네깟 년은 별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우리 언니도 같이 데려가든지, 천만 원을 내놓든지.
둘 다 못할 거면 꺼져 개썅년아!
라며 아부지로부터 물려받은 위아래 없는 싸가지로 한 방에 제압. 다시는 그년을 세 식구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만들었고, 그렇게 세 식구는 아이의 유년 시절을 단칸방에서 부대끼며 나름 오순도순 살았답니다.
하지만 섭리를 거스를 수는 없는 법. 소녀의 동생은 그럭저럭 쓸만한 놈을 잡아 결혼을 하게 됐고, 이제 소녀는 오롯이 아이와 자신의 생계를 책임질 수밖에 없었어요.
소녀는 안 해 본 일이 없었지요. 대학교 기숙사 주방일, 식당 주방일, 청소부, 가정부 등등. 웃긴 건 다 힘들어서 관뒀다는 사실 ㅋㅋㅋㅋ 유일하게 아픈 손가락이었던 둘째 딸에게 아부지는 환갑 때 어무이랑 같이 가려고 모아둔 돈으로 방 한 칸이 딸린 식당을 하나 얻어줬어요. 그날은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어느 날이었지요. 소녀는 다른 건 몰라도 요리는 자신 있다며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을 되뇌었죠.
하지만 세상사 그리 호락호락한가요. 장사는 신통치 않았고, 겨우겨우 두 식구 입에 풀칠할 만큼만 벌었답니다. 지지리 복도 없는 팔자, 하늘도 불쌍히 여긴 걸까요. 소녀의 지독한 가난은 오히려 임대아파트 청약 당첨이라는 행운으로 되돌아왔고, 근근이 모아둔 돈에다가 동생에게 얼마를 빌려 꿈에 그리던 서울 아파트에 입성하게 되었어요.
열 평이 조금 넘는 아파트였지만, 소녀와 아이는 무척이나 감격했어요. 무엇보다 자신의 방이 생겼다며 아이는 앞으로 공부를 더 열심히 하겠다는, 누굴 닮았는지 모를 달콤한 말로 소녀를 또 한 번 기쁘게 했죠.
집만 아파트지 살림살이는 별로 나아질 것이 없었던 어느날,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 철부터 들어버린 아이가 머뭇거리다 겨우 스키캠프를 보내달라 한 마디를 꺼냈어요. 소녀는 정말 한 번만 더 전화하면 자기 손가락을 부러뜨려버리겠다고 다짐했건만... 눈치 없는 손가락은 그새 다이얼을 누르고 있었죠.
엄마, 나 정말 미안한데…
우리 ☆☆이, 학교에서 방학 때 어디를 보낸다는데...
10만 원만 부쳐줘
정말 미안해 엄마
소녀는 이제 뻔뻔해진 건지 기력이 없는 건지, 울음조차 나지 않았어요. 겨우겨우 돈을 마련했지만, 순진한 아이는 글쎄 친구 아빠가 준 돈을 덥석 받아버렸지 뭐예요.
아이야, 그 돈이 어떤 돈인 줄 알아?
세상에 공짜가 없어. 다 갚아야 할 빚이야…
아이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소녀는 아이 몰래 화장실에서 담배 한 개비를 물어 들었어요. 서러움에 북받쳐 눈물이 났지만, (<발리에서 생긴 일> 보셨으면 알 텐데, 조인성처럼) 이로 주먹을 꽉 깨물고 최대한 입을 틀어막았지요. 아유 불쌍해라.
장성한 아이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공부 잘해야 갈 수 있는 대학교에 들어갔고, 소녀는 비로소 고생 끝이 아닌가 잠시 마음을 놓았어요. 이후로도 뭐 등록금도 그렇고, 갑작스런 큰 수술도 그렇고, 결혼자금도... 간간히 목돈이 필요했지만 등록금은 알아서 해결했고, 보험도 잘 들어두고, 아이가 취직하고서는 꼬박꼬박 주었던 용돈을 잘 모아뒀기에 큰 문제는 없었어요. 줬던 걸 뺏기는 기분이 생각보다 유쾌하지는 않았지만요.
야, 니 아들 집 샀다며? 같이 살자고는 안 해?
돈은 어디서 났대? 너 용돈이나 좀 더 주지
물색없이 물어보는 친구한테,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자기는 얹혀사는 시어머니 아니라고 하긴 했는데… 소녀는 조금 서운했어요. 아무리 수리하고 리모델링해도 30년이 지난 임대아파트는 고생 체질이 아닌 소녀에게 낡고 불편한 것 투성이었거든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며느리와 손주 보기에 민망한 것도 컸고요.
소녀는 잠시 떠올렸어요.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고단하게 지나왔던 고생길을 이제 벗어나기는 한 건가. 이제 장사 안 해도 되겠다, 계모임으로 친구들이랑 여행도 다니고, 다 늙어서 삼시세끼 차려달라는 남편이라면 없는 게 ‘오히려 좋아’라는 마음으로 지낼만했거든요.
오랜만에 아이의 아들이 사립초등학교에 입학한다며 아들 내외와 손주가 온다고 하네요. 왕년의 요리실력을 발휘해 상다리 부러지게 한 상 차려놨더니 글쎄 오는 길에 차사고가 났다지 뭐예요. 아무도 다치지는 않았다니 다행이긴 한데, 식어빠진 갈비찜이랑 잡채랑 이거이거 누가 다 먹나. 헛헛한 마음 달래며 소녀는 TV를 틀었어요.
알고 보면 고층 아파트들은 일반 분양 아파트, 그리고 저층의 두 개 동은 대부분이 임대아파트입니다.
임대주택 지으면서 용적률 혜택도 받았는데 이런 식으로 대놓고 차별하냐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에혀 ㅉㅉ 지랄도 풍년이다!
참! <미스터트롯>할 시간이네
아싸! 진이 오빠당~~
소녀는 드디어 진이 오빠를 만난 모양이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