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 식기 전에

감정을 말리는 밤

by 로미코샤Romicosha

오후 5시 27분.
현관문을 닫고 나니,
내 안에 무언가가 따라 들어온 걸 알았다.

남아 있는 감정.
아직 식지 않은 온기.
딱 그 정도였다.

짙지도 않고,
무겁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닌.

아마 이대로 두면
금세 식을 것 같았다.

나는 거실로 향했다.








탁자 위에 찻잔이 놓여 있었다.
김이 아직 올라오고 있었다.
희미하지만 분명히,
포도 같기도 하고, 차 같기도 한 냄새.

이번엔 주저하지 않았다.
찻잔을 들어,
그대로 한 모금을 마셨다.

뜨거웠다.
전에 비해 조금 더.

하지만 데이지 않았다.
이번엔
내 안에도 따뜻함이 남아 있었으니까.

감정이 아직 살아 있는 동안,
나는 반응할 수 있었다.

그날은 누가 말을 걸었다면
조심스럽게라도 대답했을 것이다.


아직 말이 될 수 있는 상태였으니까.

이불은 그대로 구석에 놓여 있었다.
덮지도 않았고, 정리하지도 않았다.

오늘은 그냥 이 차가
나를 덮는 감정 같았다.

그 온기만으로도 충분했다.







부도마루는 보이지 않았다.
태그는 있었고,
초승달 문양은 흐릿하게 빛났다.

나는 찻잔을 다 마셨다.

다 마셨다는 사실이
그날을 정리했다.

그 정도면 괜찮았다.









감정은 말보다 온도로 먼저 온다. 그리고 때로는, 식기 전에 마셔야 한다.



일러스트는 차를 두고가는 부도마루입니다.




#감정을말리는밤 #부도마루



매거진의 이전글감정이 터질까 봐 조용히 웃고 있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