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 죄와 벌, 주인공 로지온 로마노비치 라스꼴리니꼬프. 공공의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이 돌아갈 수 있다면 쓸모없는 벌레 '이'같은 존재는 없어져도, 아니 없어져야 한다는 그의 사상은 아무리 생각해도 흠결 없이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확고한 결단력이 실행까지 옮기는 데 성공하였을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나약함에 대해서는 완전히 간파하고 있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죄에 대한 벌은 그게 죄인지 아닌지에 대한 끊임없는 갈등에서 시작하였고 '벌'을 논하기 전에 이미 그 번뇌와 갈등 자체가 '벌'에 가까움으로 느껴진다. 또 다른 선택이 있었다면 '자살'이었지만 세상 유아독존이 아닌 그는 샐 행하지 못했다. 결국 자백을 통해 억누르는 짐을 버리는 순간까지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았던 '벌'을 받은 셈이고 그의 수형생활은 현자로 가는 길이었을 뿐이다. 죄를 깨닫고 양심의 고통을 육체의 벌로 다스렸다고 하면 흔한 스토리가 되었을 법 하지만 주인공은 살인에 대한 정신적 준비를 철저히 하였고 스스로에게, 스스로에게만 완벽한 변호를 준비하고 있었던 만큼 살인 그 행위 자체와 이유에 대해서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의 고통은 자신의 이론에 결함이 있지 않은가에 대한 탐구였을 뿐이며 결함이 없던 이론인데도 명백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고 흔들렸다는 것에 대한 자괴감이었다. 살해당한 노파와 리자베따에 대한 미안함은 단 한 줄도 찾아볼 수 없게 만든다. 그렇게 자신은 살인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정신승리로 이겨내어보려 했고 이를 통해 자신은 '이'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무기력하고 아무런 권한도 없을 뿐만 아니라 홀로 남게 될 어머니를 걱정하고 주변 사람들을 보살펴야 하는 무기력한 현실 앞에서 점점 '이'에 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신의 영역에 문을 두드렸지만 신이 아니라는 증명에 충실해질 뿐이었다.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이다. 인물의 치밀하고 깊은 갈등과 고뇌의 심리 묘사가 오랜 시간이 지나도 감동으로 잔잔히 남아 있다. 고전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2주간의 시간 동안 벌어지는 비극 속으로 흡입되었다가 해소되어 가면서 그의 심리로 몰입하게 된다. 정교하고 치밀한 묘사와 더불어 도스토옙스키의 메시지는 서서히 차오르는 벅찬 감동이 된다.
와우! 죄와 벌
지리산 정상에 오르면 그 자리에 올라오기까지의 고단함을 한 순간에 날려버리는 정상에서만 볼 수 있는 굽이굽이 산새의 정상 풍경들이 있다. 뿌듯함과 성취욕이 보상으로 수여된다. 하지만 그 감동은 시간이 지나 그랜드캐년의 숨 막히는 대자연에 자리를 내주고 나면 '장엄하고 경이롭다'는 감탄사는 이제 지리산에서는 찾기 어려워진다. 감동의 끓는점은 끊임없이 변한다. 한 번 끓었던 감동은 끓는점을 높여 다시 끓을 준비로 되돌아가고 다시 끓기 위해서는 더 많은 감동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사람의 자연스러운 욕구이니 우리를 히말라야 트래킹을 신청하고 몽골 대초원을 찾아가게 만드나 보다. 죄와 벌을 읽으며 소설의 메시지가 주는 감동, 더불어 작가의 섬세하고 황홀한 묘사에 벅찬 가슴을 품고 나면 다른 소설에서 그만한 감흥을 얻을 수 없을 것 같은 노파심에 한동안 다른 소설책에 손을 대지 못한 적이 있었다. 그 어떤 계기로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목표, 생각의 깊이, 감동의 눈높이가 그렇게 한 단계 높아지게 되면 그건 결코 후퇴하지 않을 기억으로 남게 된다.
이런저런 매체를 통해 클래식 연주회를 비평하며 곡의 완성도가 높다는 호평을 볼 수 있다. 완성도가 낮은 공연은 쉽게 알아채겠지만 완성도가 높다는 것으로 어떤 요소들이 있는지 정의하는 것도 쉽지는 않다. 완벽에 가까운 완성도를 위해서는 고른음, 선명한 울림, 작곡가의 의도에 충실한 표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연주자 자신의 작품에 대한 깊은 연구와 악기 조율까지도 그런 완성도를 이루는 조건 들일 것 같다. 어떤 곡을 공부하느냐가 다를 뿐 아마추어 연습생도 조금 부끄러울지언정 자신만의 기준으로 곡의 완성도를 마음에 품고 있다. 물론 내가 지향하는 곡의 완성도가 전문 연주자가 추구하는 목표와는 차이가 크겠지만 죄와 벌을 읽어 버린 나의 눈높이가 쉽게 다른 소설에 손을 뻗지 못하게 만들었듯 곡의 완성도 또한 한 번 높아진 기준은 다음 곡의 기준이 되어 있다. 그렇게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가면서 발전하는 나를 찾아야 성취감 또한 우러나오기 마련이다. 또 그렇게 해야만 그간의 연습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도 생각해서이기도 하다.
슈베르트의 Standchen을 5번 정도 반복한다. 짧은 곡이니 20분 조금 더 걸렸다. 더 이상 기술적으로 어려운 부분도 없다. 감성이 풍부한 멜로디이기에 연습 내내 셈여림에 주의를 기울여 부드러운 터치를 해 보려 노력하였다. 그러다 연습 과정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점이 문제로 보이기 시작한다. 기술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없기에 '배우고 있다'라는 만족감도 들지 않는다. 학습의 의미를 떠올려보면서 나의 실력은 나의 능력보다 살짝 높은 곡을 연습해야 늘어날 것 같은데 지금 연습하는 곡이 그렇지 않다는 점은 문제 아닌가라는 생각이다. 피아노 연습에 나의 나쁜 습관을 정의해 보려 한다. 그것들이 나의 학습, 발전을 방해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나쁜 습관의 반대인 올바른 습관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쁜 습관을 찾는데도 시간이 걸린다. 내가 무엇을 잘하고, 잘 못하고 있는지 과정을 복기하면서 주의 깊게 살펴본다.
*실수를 사소하게 넘기는 것
*쉽든 어렵든 속도 연습에 대한 기본을 지키지 않는 것
*레가토가 잘 안 되니 페달을 남발하는 것
*음악 기호나 프랑스, 이탈리아어 표식에 무심한 것
*모르는데 찾아보지도 않는 것)
*팔의 수평이 무너지는 구부정한 자세
*한 음 한 음 명징하게 누르지 않는 것
이런저런 잘못된 습관들을 나열해 보다가 진심으로 고쳐야 할 습관 딱 하나가 떠올랐다. 그건 바로 '나쁜 습관임을 알고도 고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닐까? 문제를 적극적으로 고쳐보려고 정면돌파를 시도하지 않다 보니 그것조차도 습관이 되어버린 듯하다. 그리고 그 뒤에는 하다 보면 되겠지라며 넘겨짚고 시간에 맡겨버리는 안이한 태도가 숨어 있었으니 이제부터는 정신 차리고 엉덩이 무겁게 의자에 오래 앉아 있는 것보다 짧게 하더라도 진중하게 제.대.로 하는 게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기로 한다. 말로만 한다면 지구도 정복했고 피아노를 쳤다면 이미 조성진을 넘어섰을 것이다. 공자의 훌륭한 말씀도 하루면 다 읽을 수 있다. 그렇다 하여 공자가 되는 건 아니다. 말과 실천을 일치시키는 데는 평생을 걸쳐 노력해도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잘못된 점을 깨달았다는데 만족하고 책을 덮어버리면 공자도, 조성진도 더 이상 없다.
모두 알고 있다. 세상 무슨 일이든 50% 하던 사람이 90% 목표를 달성하는 것보다 90% 하던 사람이 95%를 달성하는 게 훨씬 어렵다는 것을. 5%의 차이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일이든 취미든 그렇게 열심히 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일을 90%에서만 머물고 있는 건 아닌지 진지하게 되돌아봐야 할 문제이다. 취미뿐만 아니라 내가 무슨 일을 하든 삶을 읽는 태도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지금 우리는 취미를 얘기하고 있네요. 생계를 짊어진 것도 아닌, 실패해도 문제 될 게 없는 취미. 그래서취미에 도전이라는 단어도 어울리지는 않지요. 하지만 취미에도 목표가 있다면 허투루 쓰기보다는 효율적으로 쓰고 싶으니 시간 낭비는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고 그래서 고민하면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도 지당한 얘기가 된다. 그래서 취미는 돈을 달라고 하지만 재미없는 회사는 돈을 주는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