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마라톤의 출발 선상에 서 있다. 진짜 42.195km 마라톤이다. 버킷 리스트 하나 채워보자고 달렸다. 가을의 전설이라는 춘천마라톤 출발선이다.
풀 코스에 도전하기 위한 체력, 지구력을 기르기 위해 무더운 여름에는 따가운 햇살을 피해 동트기 전 새벽시간부터 훈련을 시작 했다. 동호회의 반 강제적인 이끌림이 없었다면 결코 이루지도 못했을 것이다. 목표가 다르면 준비과정이 다르다. 마라톤 대회가 그렇게 많이 열리는지도 몰랐던 마라톤 새내기는 그래도 뽐낼 건 지구력밖에 없으니 그거하나 믿고 풀코스를 달리기 위해 연초부터 매달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여 하프 구간을 달렸다.
10킬로 뛸 때와 하프코스를 뛸 때의 준비는 다르고 뛴 후의 상처도 다르다. 하프에서 풀 코스 역시 경험없이는 준비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평상시 아무 일 같지 않은 동작의 습관들이 네 시간 다섯 시간을 반복할 때 나타나는 문제는 상상초월. 손목에 찬 시계가 30km가 넘는 지점에서는 아령하나 무게로 느껴지기시작한다. 고작 100g 무게를 줄이기 위해 비용을 아끼지 않고 러닝화를 바꾸는 이유이며, 겨드랑이와 가슴팍에 옷깃과 살갗의 마찰은 두어 시간 뒤에 피를 보게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신발이 물에 젖기라도 하면 발등은 미세하게 앞으로 밀려가다가 결국 코스를 마치고 나면 엄지발톱이 신체와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에 경악하다가도 전혀 느끼지 못할 만큼 통증도 없이 뽑혀나갔다는데 두 번 놀랜다. 그렇게 세 번 정도 풀 코스를 경험하고 나면 몸에 걸치는 모든 것은 처음과 바뀌어 있고 뛰는 게 가장 돈이 적게 든다는 건 동네 한 바퀴 도는 조깅일 때의 얘기일 뿐이었는 걸 알게 된다. 사람은 배워야 한다는 말을 읊조리면서...
체코의 마라톤 영웅 에밀 자토페크(Emil Zatopek, 1922 ~ 2000)가 했던 말 "달리고 싶다면 1마일을 달려라. 그러나 삶을 경험하고 싶다면 마라톤을 하라"라는 말을 가슴에 품고 인생을 곱씹어보면서 달렸다. 풀 코스를 뛰는데 4시간 반 정도로 완주한다. 멀리 가려면 천천히 가야 하고 자신의 페이스는 경험을 통해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오르막길, 내리막길 페이스가 다르고 더운 날씨, 서늘한 날씨에도 페이스는 달리 해야 한다. 옆 사람의 실력을 모르니 무작정 보조를 맞추다가 제 풀에 쓰러질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의 페이스를 잃지 않고 스스로 실력에 맞춰 조절해가야 하니 결국 군중 속에서 혼자 달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게 마라톤이다. 가장 어려운 구간,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 한계에 이르는 지점은 마지막 골인 지점이 아니었다. 35킬로 정도였다. 초반 5킬로 10킬로에서는 몸도 살짝 무겁고 아~! 내가 이걸 왜 또 달리나, 미쳤다, 지난번 그렇게 힘들었잖아를 되뇌며 맹목적으로 주변 사람들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휩쓸려 간다. 10킬로가 넘어가면서 잡담은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쉭쉭 숨소리만 들릴 뿐이다. 체력에 따라 사람들 간의 간격이 벌어지기 시작하고 나는 천천히 고립되어 간다.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혹시 아침에 먹은 음식이 탈 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떨쳐내질 못한다.
생각은 점점 원초적 인간의 수준으로 되어가면서 하프를 목표로 달려가고, 그렇게 결국 하프 선을 넘어선다. 하프의 의미는 이제부터는 달려야 할 거리가 달려온 거리보다 짧기에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 지점이다. 남은 거리를 알려주는 안내판을 저 멀리서부터 주시하면서 1킬로씩 줄어드는 맛을 음미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체력적인 고통이 조금씩 밀려 올라오는 걸 정신력으로 막아보는 것도 한계가 오기 시작하고 35킬로 지점에서 그냥 주저앉고 싶은 정점에 이른다.
왜 35킬로 일까? 육체와 정신 둘 다 힘들어 서로 누가 힘드네 티격태격 할 기운조차도 없으니 결국 둘은 화해 모드로 돌아서 서로 협력해서 일단 이걸 끝내고 보자며 다툼을 미룬다. 바로 그 끝내보자는 욕심이 생겨나는 구간이 35킬로 즈음이다. 또 다른 내가 나를 다독이며 이제는 포기할 수 없다는 정신력이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에너지를 쥐어짜내고그렇게 골인 지점을 통과한다. 또다시 완주했다는 기쁨은 달리기라는 운동을 중독으로 만들기도 한다. 욕심내어 시간을 단축하겠다며 과도하게 한다면 위험한 운동일 수 있지만 가을바람 냄새를 맡으며 기분 전환하고 나를 성찰하는 달리기를 하겠다면 마라톤은 5시간 동안의 즐거움, 어려움, 괴로움, 환희를 맛보도록 해 주는 자신만의 짧은 인생기록이 된다. 에밀 자토페크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인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시간이 흘렀고 지금은 피아노가 나의 마라톤 이야기를 대신해 주고 있다. 마라톤으로 치자면 어디쯤 달리고 있을까? 나의 인생은 25킬로쯤 뛴 것 같고, 피아노 인생으로는 이제 5킬로 정도가 되었을까? 달려보지 않은 마라톤 초보가 겪었던 우여곡절이 피아노라는 악기에도 있겠지만 그 골인지점의 달콤함이 분명 숨어있을 거라 믿기에 신발 끈을 다시 매급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마라톤이든 피아노든 남들이 보기에 아주 사소해 보이는 그 무엇이든, 그것에서 나를 찾고 인생이라는 꽃바구니를 채울 꽃 한 송이를 찾아본다. 마라톤을 달리면서 자토페크의 말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면 지금은 니체의 "음악 없는 삶은 오류다"라는 표현이 참 마음에 와 닿는다. 완주하고 나서 그 문구를 다시 볼 때의 감회는 분명 또 다를 것이고 그래서 더더욱 완주를 하고 싶다. 인생의 완주는 내가 원하지 않아도 오겠지만 피아노에서 완주의 목표는 몇몇 버킷리스트, 그리고 계속 늘어나는 버킷리스트 곡들을 하나씩 연주해 나가는 게 아닐까 한다. 완주된 곡을 되돌아보면 나의 인생에서 피아노는 단지 음악을 사랑했다는 증거일 뿐일 수 있고, 잠시 잊고 살고 있지만 노력한 만큼 얻는다는 단순한 진리를 다시 되새겨준 존재일 수도 있다. 분명한 건 스스로에게 진심을 다해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
피아노는 참 어려운 악기이다. 그래서 알아도 아는 척하지 않는 겸손쯤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말장난 같지만, 모르는 게 무엇인지 모르기에 내가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알지 못하겠다. 그래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저 깊은 바다 아래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 크기와 힘은 짐작하겠지만 상대를 정확히 모르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노인이 되었다. 이제 걸음마 시작한 아이가 올림픽 육상선수 경기를 너무 많이 봐 버린 탓이다. 말똥구리는 말똥을 좋아할 뿐 여의주를 탐내거나 부러워하지 않고 용 또한 여의주를 자랑하거나 말똥을 비웃지도 않는다.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으니까. 조금씩 걸어갈 뿐이다.
사실, 피아노가 필요한 게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갈망했던 것은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나태해지는 걸 싫어해서 책을 보든 글을 쓰든 피아노 연습을 하든 무언가 생산적인 활동을 하려는 기질에 충실한 것이라 생각한다. 단지 피아노는 지금까지 해 왔던 다른 취미활동보다도 많은 집중력과 노력이 필요하기에 무엇보다도 나에게 가장 큰 정신적인 만족감을 줄 것으로 믿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활동의 결과물이 무엇이냐에 대한 질문은 나를 스스로를 곤란하게 만들기도 한다. 취미생활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그게 먹고사는데 어떤 도움이 되는데? 언젠가 피와 살이 될 거라 근거 없는 낙관은 현실을 회피하는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낙관주의라는 게 위험을 피해 자기를 보호하려는 자연스러운 방어본능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나의 피아노 취미는 나를 표현하는 또 다른 언어의 글쓰기일 뿐이지 스트레스니 뭐니 하는 진부한 환경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생각은 별로 없었다.
비록 초보자이고 전문 음악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기에 여기저기 음악과 음학에 대한 얘기, 특히 피아노 연주 기법에 올바르지 못한 부분도 있을 것 같다. 마라톤 풀 코스 다섯 번 뛰어 본 사람이 이게 맞다고 핏대를 세우며 아는 체했지만 오십 번 뛰어보면 더 겸손해질 거라는 걸 알기에 마음은 조심스럽다. 마음속의 이야기는 여전히해운대 모래 알갱이만큼이나 있고 자칫 혼자만의 타성에 빠질 수 있겠지만 그중에 한 바가지 정도의 모래만큼은 시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을 사실이 있을 것입니다. 음악을 사랑한다는 진실 한 바가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