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원짜리 돈 방석위에 앉은 부처님
따글따글한 파마머리. 빨간색 잠바. 천 원권 무더기
소박하고 아담한 박물관 문 앞에 도착하니
이제 막 아침 9시가 될 참이었다.
관람하긴 아직 이른 시간임을 확인한 후에
주위를 둘러보니 나처럼 평일 이른 아침부터
불국사 박물관이 궁금해 부랴부랴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박물관 문이 열리자마자 혼자 입장하려니
조조 영화를 볼 때 아무도 없어
넓은 영화관에 혼자 앉아 영화를 보는 느낌,
딱 그거였다.
오. 좋아!
박물관 혼자 관람이라니!
이런 건 또 흔치 않지!
불국사 경내에 있는 박물관은
불국사의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전시된 유물들은 다양하고 흥미로워서
둘러보기 좋았다.
나는 좌우로 진열된 유물들 앞을
꼼꼼하게 차례대로 훑으며
천천히 느린 속도로 관람을 했다.
그중에 사리를 담는 아주 작고 화려한 금속상자가 있었는데 관람객이 나 혼자이니
전시된 유물 앞에 최대한 바싹 다가가
설명을 곁들여 읽으며
상자 외관 세밀한 새김들을 감탄하며 구경했다.
전시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유서 깊은 탱화도 여럿 있었고.
여러 내용들을 기록해 둔
중요 인물들이 남긴 서책들도 많았다.
화려한 전시품들이 아니기에
작정하고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관람할 생각이 아니라면
슬쩍 보고 지나칠 수도 있는 유물들이었다.
고즈넉하고 여유로워
아주 만족스러운 관람이었다.
이렇게 박물관 전시를 혼자 대관한 것처럼
구경할 기회는 많지 않으니!
전시된 유물들 2/3쯤 살펴보고 있을 때쯤
박물관 입구 쪽이 와글와글 시끄러웠다.
잠시 후
와글거리며 박물관에 입장한 그들이
전시관 내부로 우르르 몰려 들어왔는지
전시실은 순간 도떼기시장이 되었다.
전시실에 들어온 할머니들은
서로를 찾아 불렀고
아주 크으으은 소리로
당신이 여기 있음을 만 천하에 알렸다.
어이. ㅇㅇ댁!
어딨어어어. 아. 빨리와아.
으응! 나 여깄어어.
나 화장실 갔다 왔다니께에.
혼자 조용히 관람하던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에이.
이제 혼자 조용히 관람하긴 글렀네!!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려서
와글거리며 전시장에 입장한 이들의 무리를
곁눈질로 슬쩍 살펴봤다.
시골 동네에서 바쁜 농번기 다 보내고
들판 수확을 마친 후에
동네 사람들끼리 뜻을 모아
버스 한 대 대절한 다음,
단풍 구경이나 가자. 해서
경주 나들이 나온 것이 분명해 보이는
시골 할머니들과 할아버지들이었다.
할머니들은 한결같이
단풍놀이 날짜가 다가오기 전에
다들 손 잡고 장날 읍내에 나가서
한날한시. 같은 미용실 원장님이 말아줬음직한,
따글 따글한 파마머리를 하고 있었다.
미용실 원장님은
잘 풀리면 안 되니 아조 딴딴하게 말아달라는
할머니들의 주문을 성실하게 받아들여 말았는지,
할머니들 파마머리는
두피에 견고하게 딱 달라붙어
평생 동글동글한 파마형태가
절대 흐트러지지 않을 모양새였다.
단풍 나들이를 맞이해서
역시나 장날 읍내에서
큰맘 먹고 사 입었음직한,
할머니들의 총 천연색
빨갛고 노랗고 보라색 잠바, 티셔츠, 바지들은
그날 절정이라던 단풍보다 더 빨갛고 화려했다.
이러한 차림새로 전시실로 입장한 할머니들 무리는
좌. 우 전시된 역사 깊은 서책들과 도자기와 사리함을 한 번씩 슬쩍슬쩍 쳐다보고
빠른 속도로 슥슥슥슥 지나가며
서로 얘길 했다.
아. 저번에 우리 딸이 테레비를 사다줬는디 말이여.
아니 그 테레비가 월마나 큰지 말이여.
테레비에서
말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뛰어가는디
아조오 하안참을 뛰어가더라고오오.
저 ㅇㅇ네 집 사위가 말이여.
아. 바람이 났디야아아.
그래서 ㅇㅇ이가 사네 못 사네 한다드만.
이러한 대소사 정보를 서로 나눠가며
내가 한 시간 반동안 관람하고 있어도
2/3를 채 못 본 전시실을
할머니 무리들은 불과 십오 분 만에 슉슉 슉슉
유물들 사이를 통과해서
전시실을 빠져나갔다.
ㅡ복도를 통과하듯이!ㅡ
할머니들은 경주 불국사 박물관에 전시된
유명하고 귀하다는 보물들보다,
누구네 사위가 바람이 나서
누구네 딸이 곧 죽게 생겼다던지.
내 딸이 사다준 테레비 성능이 얼마나 좋은지
자랑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사실이 그렇잖은가!
죽은 지 수백 년 된 사람들이 쓴 서책들과 물건들이
이 할머니들과 무슨 상관이라고,
살아있는 자의
크고 작은 번뇌와 기쁨 보다
더 중요할 일인가 말이다.
조용한 전시실의 고요함을 깨는
할머니들의 목소리는
소풍 나온 소녀들처럼 들떠 있어 경쾌했고,
종종 와그르르 웃음이 터졌다.
그 모습을 곁눈질로 살펴보는 나 역시
할머니들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할머니들의 대화를 본의 아니게 듣고 있다가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할머니들이 이제 다 빠져나갔는가 싶어서
나도 천천히 여유 있게
남은 전시 유물을 둘러보고
이제 마지막 코너 전시 라인으로 진입했을 때였다.
전시된 유물 마지막 코너 쪽에는
부처님 불상 세 분이 앉아 계셨는데
모든 박물관 상설전시실에는
그곳의 대표 전시 유물이 있듯이
짐작건대,
이 박물관 전시실의 하이라이트는
이 부처님 세 분 불상인 것 같았다.
1미터 60센티 정도의 앉은 크기에 화려했으며
전시실 몇 개의 강한 핀 라이트는
이 부처님 세 분 불상에 맞춰져 있었다.
전시된 불상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건
부처님 발 밑에 수북하게 쌓인
천 원권 지폐들이었다.
천 원권 지폐들을 수북하게 쌓아놓고 간 사람들이 누군지 알 것 같아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따글 따글한 파마머리를 하고
총 천연색 화려한 옷을 입고서
살아있는 자들의 희로애락 대소사 소식을
서로 나누며
죽은 자들이 남긴 유물들 사이를
빠르게 직진하다가
그들 발길을 멈추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세분의 부처님 불상이었다.
전시실에 전시된 부처님은
불당 내 부처님과는
다른 의도로
다른 장소에 앉아 계셨지만
할머니들에게는
부처님이 앉아계신 장소가
불당이든 전시실이든
무슨 차이가 있었겠는가.
할머니들은
부처님이 계신 곳이 어디든
부처님 불상이 계신 곳에 선,
응당 걸음을 멈추고
옷매무새를 다시 정돈하고서
부처님 앞에 나아가
진실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두 손을 모아 허리를 깊이 숙이고
앞날 창창한 내 자식들과
아픈 남편과
이제 막 태어난 어린 증손주의
건강과 평안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전시실에 전시된 부처님 앞에
수북하게 쌓인 천 원짜리 지폐들은
평생 시골 농사하며 주름지고 굽은 손가락을 지닌
늙은 어미의 손길에서 나와
사랑하는 가족들의 평안을 빌며
부처님 앞에 정성스럽게 올려진
성스러운 제물 같아 보였다.
이곳저곳 박물관들을 구경할 때
전시된
크고 작은 불상들은 흔히 볼 수 있었다.
전시된 그 불상들 발 밑엔
그 불상이 가진 내력이 적혀있는
설명 붙은 푯말 자그맣게 있었지,
이렇게 부처님이 돈다발을 발 밑에
수북하게 밟고 계시는 모습은
난생처음 보는 광경인 것이었다.
예기치 않은 곳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특별한 장면은
늘 울림이 깊고 평생 지워지지 않을
여운을 남긴다.
그날 조용한 전시실에
우르르 몰려왔다 몰려간
파마머리 할머니들의 화려한 옷차림.
부처님 불상 앞에 멈춰 서서
간절한 기도를 담아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깊숙하게 숙이며 기도하는 모습.
할머니들이 너도 나도
조심히 내려놓았을 천 원권 지폐 무더기, 가
올해 단풍이 절정입니다.라는 뉴스를 들을 때마다
매년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때 천 원 지폐 무더기에 담긴
할머니 자식들과 남편들의 평안이
오늘도 안녕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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