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너 이제 엄마가 생기는거야?
저녁 식탁. 삐뚤삐뚤 개켜진 이부자리.
아들 녀석이 8살 때
아들 베프 A와 B가
집에 놀러와 함께 저녁밥을 먹는데
A가 갑자기 생각이 난듯 말했다.
ㅡ이모.우리 아빠 신혼여행갔어요ㅡ
ㅡ아빠가 결혼하셨구나.
ㅇㅇ이 이제 엄마가 생겼네.
ㅇㅇ아. 정말 축하할 일이구나!ㅡ라고 하니
ㅡ엄마라고 불러야하는데 아직은 쑥쓰러워서
그렇게 부르질 못했어요.ㅡ
A가 그렇게 답했다.
그때 B가 물었다.
ㅡ그럼.너 이제 진짜 엄마가 생기는거야?ㅡ
ㅡ응.ㅡ
B가 다시 말했다.
ㅡ아빠가 결혼하면 진짜 엄마가 생기는거구나.ㅡ
자세한 가정사는 알수없으나
A는 한살이 되기 전 엄마와 헤어져
할머니손에서 자랐고
B 역시 애기적부터
연로한 할머니 손에서 자란 아이다.
세 아이 사이에서 밥을 먹던 나는
아이들 대화에
갑자기 가슴 께와 목에 무언가 걸린듯 하여
물을 가져다 몇모금 마시고
아무렇지 않은 듯 밥을 먹었다.
아들의 또 다른 베프 C는
고모손에서 자라는 아이로
그 아이 역시 엄마가 없다.
이 아이가 애기적에
갑작스런 변고로 엄마가 돌아가시고
고모 손에서 크고 있다.
내 아들 녀석 베프 친구 셋은
각자 아픈 사연들이 있고
모두 엄마가 없다.
아이들이 우리 집을 자기들 아지트 삼아
놀고 가거나 몇 일을 자고 가더라도
나는 이 아이들을 앞에 두고
단 한번도
아이들 가정사를 묻거나 들먹인적이 없다.
혹여나 무심코 던진 내 말 한마디에
여린 아이들 마음에 상처를 입힐까 겁이 나서였다.
예전에
나와도 인연있었던 C 엄마 장례식을 치룬후에
그 장례식을 찾아갔던
C의 형아네 반 학부모들이 나중에 모여서
그 아이 엄마 변고에 대해
뒷 이야기를 했단 소리를 들었다.
어린 아이들도 다 듣는 귀가 있어서
조심성없는 엄마들이 모여 수다를 떨 때
아이들은 또 그 소문을 듣고서
반에서 지들끼리 그 이야기를 나누다가
담임샘이 그 이야기를 듣고서
정말 크게 분개하셨다 했다.
그 반 담임 선생님은 너무 속상하고 슬퍼서
그 사건 당사자 학부모들을 학교로 불러 들인 후
눈물을 쏟으시며,
같은 부모로서 이건 아니지않습니까.하셨다는 이야기도 듣게 되었다.
나는 그때 그 수다스런 여자들의 입방정에
아이가 상처를 입었을것을 생각하니
정말이지 화가 났고 슬펐다.
남의 불행을 가쉽거리삼아 쑥덕였을 이들도
내가 익히 잘 아는 이들이어서
평소 그이들의 품성이나 경박스런 행동을 생각해보자면
어찌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나는 내가 상처를 입은듯
마음이 아팠고 우울했다.
천박하기 이를데없는 망할 여편네들 같으니!
그후 몇년이 지나
내 아들과 베프가 된 C가
그 아이 동생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C나 아들 녀석,
아무도 몰랐겠지만
나는 C가 우리 집에 오는 날
C를 볼때마다 짠한 마음이 들어서
항상 장난스럽게 꼬옥 안아주었다.
아들 녀석 베프 A.B.C는
엄마가 없다.
이 네 아이들이 어찌 베프가 되었을까.
잠시 생각해본적이 있다.
집들과 동네가 멀리 떨어져있는
시골학교 특성상
보통 어릴적에는 친한 엄마 아이들끼리
왕래가 잦고 교류가 깊어지며
더욱 더 친한 사이가 된다.
아들 반 아이들 구성상
육지 가족들이 대부분인지라
보통은
육지 가족은 육지 가족끼리 소통을 했다.
우리 역시 육지 가족이긴하나
육지 이주가족이 거의 없던
ㅡ18년전 아이들 학교에서 우리는
육지 이주가족 1호였다.ㅡ
큰 아이때부터
ㅡ폐교 위기였던 그땐 토박이 가족이 대부분이었다.ㅡ
학부모 교류를 해온 터라,
나는 육지 이주 가족이면서도 친한 학부모들은
모두 토박이 친구들이 대부분인
특이한 케이스긴 했다.
육지 엄마이면서도 육지 엄마가 아닌 엄마가
그때 나였다.
폐교위기 작은 시골 학교였던 아이들 학교는
학교를 살리고자 노력하는
학부모들 연대가 탄탄했고 건강했으며 유명했다.
학부모 봉사 단체를 만들어
기꺼이 참여하는 자발적인 봉사
학교 살리기 대외 활동 등등
약 10년가까이 엄청난 집중력으로
학부모들은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학교에서 봉사를 했다.
그때 학교 엄마들은
시골 학교 전교생 아이들의 이름과
누가 누구 동생이고 누나이고 사촌간인지
쫙 꿰고 있었다.
누구 집 사정이 어떠하고
누가 누구랑 살고 있는지도 말이다.
개인 사정이 안좋은 아이들은
엄마들이 학교를 오고가며
한번 더 이름을 불러주고 챙겨주곤 했다.
내 아이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10년 넘게 학교 분위기가 잡히니
학교는 좋다고 소문이나서
유명한 시골학교가 되었다.
폐교위기였던 별볼일 없는
제주 중산간 시골 학교가
유명한 학교가 되어
육지 가족들이 봇물 터지듯이 전학해 왔다.
그렇게
육지에서 이주해 온 엄마들은
내 아이외에
반 아이들의 개인사엔 관심이 없었다.
어떤 아이 개인사가 힘든지
어떤 아이 개인사가 슬픈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런 엄마들끼리 친밀해지면
그 집 아이들이
서로 베프가 되고 단짝이 되었다.
그러니
내가 생각하기에,
엄마없는 A. B.C 는
다른 친구 가족들과 교류할 연결고리가 없으니
어쩌면 자연스럽게도
서로가 더 의지가 되는
그런 베프가 되지 않았나 싶다.
아이들이 아지트삼아
놀러오기 좋아하는 우리 집은
특별히 그 아이들에게 잘해줄 것은 없으나,
언제나 와도 그냥 자기 집마냥
편하게 놀다갈수 있으니
아이들이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그 아이들을 맞이하는 나 역시
아들 반의 수다스런 엄마들과 전혀 교류하지 않았으니
그 아이들이 파고들어 놀다갈수 있는
아주 자그마한 틈새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하룻밤을 자고 갔다.
세 아이들과 아들 녀석에게 밥을 차려줄때
아이들은 감사하게 밥을 받아들고서 맛있게 먹고
방으로 들어가 재밌게 놀았다.
아침이 되어 아이들이 떠난
아들 녀석 방을 보니
삐뚤삐뚤 개켜놓은 이부자리가 눈에 보였다.
삐뚤삐뚤 개켜진 이부자리를 보다가
나는 갑자기 이유없이
목에 울음대가 꽉 차올랐다.
그 당황스런 감정이 무엇이었을까.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후에
그날 나는 마당에서 혼자 세차를 하다가
그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그 세 아이를 자꾸 생각했었다.
오늘 아침에 마당에서 세차를 하다가
문득, 그때 그 아이들이 생각났다.
아이들이 삐뚤삐뚤 개켜둔 이부자리.
그날 아이들 이부자리가 내게 남긴
길고 깊은 감정과 생각의 파장.
긴 시간이 지나온 지금이지만
나는 여전히 그날 아이들이 개켜둔
이부자리에 마음이 울컥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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