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퐁소 도데 형님의 맑은 기운을 받아보겠습니다
오늘은 우리 삶의 목적과 평소에는 잊고 살았던 우리의 세속적임에 대해서 좀 얘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뉴스에 나오는 재벌, 정치인 또는 범죄자들의 뉴스에 귀 기울이며 그들의 ‘욕심’에 대해 삿대질을 하고 쉽게 비난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우리 개개인의 삶도 끝없는 욕심과 다양한 욕구로 가득 차 있어요. 물론, 그 정도의 욕심은 ‘도덕적 기준’ 내에서 이뤄지고 때때로, 도덕적인 기준은 초과해도 ‘법적인 허용범위’ 내에 있다 보니 눈에 띄게 부각이 안 될 뿐이죠.
잘 생각해보세요. 우리 모두의 삶은 적절한 욕심과 이기심 덕분에 개개인이 모두 개별적으로 적당한 범위 내에서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고용주와 피고용인은 서로가 요구한 최소한의 욕심과 이기심의 제한 범위가 교집합 내에 있기 때문에 고용이 유지됩니다. 만약, 고용주가 피고용인에게 조금 더 무리한 성과를 요구하거나 피고용인이 고용주에게 조금 더 무리한 급여를 요구한다면 서로의 관계 밸런스는 무너지게 됩니다.
따라서, 적정한 범위 내의 욕심과 이기심은 어떤 관계와 현상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필요충분조건이기에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주 가끔 ‘아무런 욕심’도 녹아있지 않는 순도 100%의 순수한 의도와 예기치 않게 마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역시 그런 순수한 의도를 내비친 이의 심리 저변에 깔린 욕심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이를 마주한 순간의 ‘저릿한 감동’은 실로 우리의 언어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다가오게 마련입니다. 설명이 길어졌네요. 오늘 모신 형님은 우리의 가슴 깊숙한 바닥, 먼지가 짙게 쌓인 ‘순수한 감동’이라는 감정을 다시 한 번 꺼내보게끔 만들어주신 형님이십니다. 프랑스의 문호, 알퐁스 도데 형님입니다.
안녕하세요? 도데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어떤 목적으로 무엇을 위해 살아가나요? 많은 돈을 벌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 많은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고, 매력적인 이성을 만나는 등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지 않나요? 이는 19세기에도 마찬가지였답니다. 전 프랑스 사람이라 그 시절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르는군요. 지금도 비슷하거나 더하겠지만 그 당시에 프랑스의 문란한 연애 문화는 너무나도 유명했어요. 현대인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도 지금 돌이켜보니 정말 너무하다 싶을 정도였네요. 이런 문란했던 시절의 단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이 ‘보바리 부인(귀스타브 플로베르)’이죠.
그런데 전, 욕정에 이끌려 타락하고, 망가지는 삶이 너무나도 싫었답니다. 그래서 오직 순수함으로 가득 찬 플라토닉 한 사랑에 대한 따뜻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물론, ‘성애’가 잘못되었다는 건 아녜요. 허나, 수많은 젊은 이들이 ‘성애’에 집착하다 보니 연인 간 상처 입는 일들이 발생하고 이들이 또 수많은 범죄로 이어지기도 하니 문제란 말입니다. 아마, 이런 현상은 지금도 마찬가지일 테죠. 인간이라는 동물의 본능은 역사가 흘러도 변하지 않을 테니. 그렇다고 제가 욕정이 없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저 이는 때와 관계에 따라 절제하고 조절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그럼, 제 소설인 ‘별’을 잠깐 같이 들여다보시죠. 소설이 내뿜는 ‘티 없는 순수함’에 대한 상황적 설명일 필요하니 전반적인 스토리를 좀 들려드릴게요. 뤼브롱산에서 양치기를 하는 목동은 일의 특성 때문에 사람을 거의 못 만나죠. 당연히, 마을의 파티나 잔치에 참석은커녕,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는지 조차도 식량을 가지고 2주에 한 번씩 산으로 올라오는 아주머니나 꼬마 아이에게 듣는 게 전부 일 정도로 마을의 행사와는 거리가 멀었죠. 하지만, 무엇보다도 제일 궁금한 건 주인집 딸인 ‘스테파네트’의 소식이었어요. 하지만, 그녀는 워낙 미인에 인기가 많아 자신 같은 천한 목동과는 어울릴 수 없는 신분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식량 배달이 늦어져서 한참을 기다리던 목동은, 어떤 영문인지 직접 노새를 타고 자신에게 식량을 배달하러 온 스테파네트를 마주하고는 깜짝 놀라게 돼 죠. 그리고 스테파네트는 목동 삶의 생경한 풍경을 보며 호기심에 어린 얼굴로 이것저것 물어보고 시간을 보낸 뒤 다시 마을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얼마 안 가 그녀는 옷이 흠뻑 젖은 채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소나기 때문에 강이 불었던 걸 억지로 건너려다가 물에 빠진 거죠. 목동은 그녀가 걱정돼 불도 피우고 먹을 것도 가져다주지만 스테파네트는 모든 상황이 무섭고 걱정되어 모두 거부하죠. 목동은 그런 그녀를 위해 새 모피로 거처를 더 깨끗하고 따뜻하게 마련해주고 자신은 조심스레 밖으로 나와버립니다. 그리고 이윽고 그녀가 자신의 보호하에 있다는 사실에 감격해마지않습니다.
하지만 잠을 못 이룬 스테파네트는 곧 밖으로 나오고 목동은 황급히 자신의 모피를 벗어 그녀에게 걸쳐주고 모닥불도 더 세게 피워요. 산에서 밤을 보내는 게 처음인 스테파네트는 작은 소리에도 놀라며 목동에게 다가와 앉았죠. 그러던 중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별똥별을 본 그녀가 이에 대해 물으며 둘은 한동안 밤하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한참 목동의 이야기를 듣던 스테파네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목동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잠들었고, 마음이 설레며 몸이 얼어붙은 목동은 해가 뜰 때까지 그녀의 얼굴을 보며 그녀를 지키고 보살펴주며 이런 생각에 이르게 되죠.
‘밤하늘의 가장 예쁘고 밝은 별 하나가 길을 잃고 내려와 내 어깨에 기대어 잠들어 있다고..’
당시에는 신분제가 폐지되었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신분에 대한 경계와 억압이 있었죠. 그래서 목동이 주인집 딸을 넘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어요. 하지만, 소설과 같이 목동에게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고 충분히 다른 마음을 먹을 수 있는 상황에도 목동은 그녀를 지켜주고 보호해주고픈 ‘순수한 마음’만을 일관되게 유지합니다. 목동은 유치 찬란한 언어로 그녀에게 접근하지도 않았고, 무방비 상태에 있는 그녀를 위해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모든 것(급하게 따뜻한 거처 마련, 모피를 두벌이나 내어줌, 밤새 모닥불 피워줌, 게다가 어깨도 내어줌)을 하고도 더 해주지 못함에 안타까워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불안함이 덜해지고 경계심이 풀어진 그녀가 그에게 다가왔을 때도 목동은 끝까지 자신의 선을 지키고 마치 ‘순수의 결정체’와 같은 그녀를 보호하고 지키며, 그런 임무를 수행하는 것 자체만으로 모든 만족이 이뤄진 듯 ‘순수함’을 이뤄냅니다.
사실, 이 조차도,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신분)이라는 거대한 벽 때문에 애초에 플라토닉 한 짝사랑 외에는 답이 없는 관계이기에 가능했고 따라서 목동 역시 자신의 안위를 고려한 거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와 유사한 사랑의 구조가 부모와 자식 관계라는 점을 보면 어쨌든, 보통 사람이 행할 수 있는 ‘순수함의 결정체’라는 점에서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소설은 더 이상의 클라이맥스 없이, 이 자체로 훌륭한 선을 이루었기에 ‘순수함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죠.
그럼 이를 여러분의 삶에 대입해보시죠. 순수하게 플라토닉 한 사랑만을 하라고요? 그런 생각에 이르렀다면, 제 의도를 완전히 다르게 받아들이신 겁니다. 제 말은 자신의 삶 속에서 그리고 사회 속, 자신의 역할에서, 학교에서, 일에서, 직업에서, 직장에서 이룰 수 있는 순수함은 무엇이고 한 번이라도 순수함 찾거나 이를 행하고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 적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 말입니다. 자신의 철학이 세속에 더 가깝고, 자신의 삶은 이를 이루기 위함이라면 굳이 ‘순수함의 카타르시스’를 위한 노력을 할 필요는 없겠지만 말이죠.
순수함으로의 여정은 타인이 보기엔 조금 바보 같고, 손해 보며, 고집스러워 보입니다. 하지만 이는 언젠가 ‘장인’이 이뤄낸 결과물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선물을 해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순수함은 그런 결과를 바라고 하는 건 또 아닙니다.
‘순진하면 당하지만, 순수하면 결국엔 이긴다.’
그러니 정도껏 욕심을 부리되, 가끔은 ‘순수한 힘’으로 조용히 밀어붙이다 보면 뭔가 통하는 날이 올 겁니다. 마치, 목동에게 ‘순수함의 끝을 맘껏 발산할 수 있는 밤’이 왔던 것처럼 말이죠. 당신에게도, 또, 나에게도 다시 그런 날이 오길 바라며.
[이미지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