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현혹의 밤 2

by Rooney Kim


선준은 행장이의 정신이 돌아오도록 두 뺨을 번갈아 때렸다. 그러자 행장이가 안간힘을 쓰듯 겨우겨우 스르르 반쯤 눈을 떴다.


“자야, 저길 보거라 풀섶의 나뭇잎과 가지들이 바람 반대 방향으로 심하게 기울어있지 않느냐. 환영이다. 꿈속인 게야. 깨어나야 한다.”


그러자 행장이가 조금 정신을 차린 듯 처음으로 입을 뗐다.


“아재, 쩌어기 뒤에 우리 엄니랑 아부지가 있당께요.. 낫과 곡괭이를 든 나쁜 놈들을 내가.. 내가 물리쳐야 우리 엄니, 아부지를.. 내가 지켜야.. 내가..”

“자야, 환영이다. 우리 둘 다 이중 결계에 걸린 게야. 그러니 어서 여길 빠져나가야 한다. 우리 둘 다 꿈에서 깨야한단다. 정신을 차리거라..!”


하지만 행장이는 다시 동공이 풀리며 꿈속으로 빠져들었고 대숲에는 수백 아니 그 보다 더 많은 원혼이 선준과 행장이를 멍하니 응시하며 느릿느릿 다가오고 있었다. 몇몇은 한쪽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오고 있었고 대다수는 다리가 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축귀를 행한 선준도 이런 압도적인 광경은 처음이었다. 문득 아버지인 소천이 했던 말이 또 생각났다.


‘백중 후에는 전국 팔도의 숨은 귀신과 망령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들어 제들끼리 아주 괴랄한 광란의 잔치를 한단다. 그래서 우리 같은 승려들도 잠시 축귀를 멈추고, 무당들은 굿을 하며 그들을 달래지. 앞으로 일 년 동안 이승에 머물 수 있으니 얼마나 좋겠느냐. 사실, 저승으로 가는 게 더 좋은 건데, 망령들이 이를 알리는 없지. 아무튼 축귀를 하면 소멸되거나 저승으로 강제 소환되니 저들도 많이 무서울 게야. 그러니 그걸 당하지 않으려고 백중 후에는 온갖 망령들, 상관없는 녀석들까지 몰려와서 이 마을, 저 마을에 훼방을 놓고 축귀를 하는 승려나 무당을 공격하는 거야. 그것도 수백이 떼로 몰려와서 말이지. 그러니 백중 후 한두 달은 되도록 축귀를 하지 않고 조심하는 게 좋단다.’


선준은 행장이를 둘러업고 냅다 마을로 달려갔다. 마을 입구에는 지난밤에는 보지 못했던 장승 둘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에 선준은 기가 막히고 말았다. 천하대장군은 반으로 쪼개져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지하여장군은 거꾸로 박혀 해괴스럽게 입만 벌리고 있었던 것이다.


‘젠장할.. 장승조차 없는 이런 곳에서 잤으니..’


하지만 지금 당장은 이곳 외에는 피할 곳이 없었다. 마을의 집은 열 채도 안되었지만 새벽에 머물렀던 작은 집보다 더 안전한 곳이 필요하여 이 마을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은 어느 집의 어두컴컴한 광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어느새 동이 터 날은 이전보다 훨씬 밝아오고 있었다. 진시가 되면 저들도 어디론가 숨어 들어갈테니 그때 여길 빠져나갈 심산이었다. 점점 동이 터왔다. 선준은 마음이 조금 놓이자 동태를 살피기 위해 단단하게 걸어 잠근 광의 입구로 살며시 걸어갔다.


‘쾅- 쾅- 빠지직-‘


선준이 문고리를 잡고 살짝 열어보려는 순간 밖에서 광의 문을 부수려는 듯 무언가로 내리치고 꽂는 소리가 마치 천둥처럼 들려왔다. 놀라 당황한 선준은 행장이에게로 다시 돌아가 보따리 안의 일령을 찾았다.


‘없어. 일령이.. 없어. 그럼 이건 또?!’


선준의 온몸은 이미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어있었다. 행장이는 꿈속을 헤매는 듯 자리에 누워 팔과 다리를 휘젓고 있었고 광의 입구는 수 백의 낫과 곡괭이 그리고 죽창이 광의 문을 내리치고 찌르는 소리로 가득 찼다. 선준 자신만큼은 제정신을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선준과 행장이 둘 다 여전히 꿈속이었던 것이다.


‘쾅- 쾅- 와지끈-‘


어찌할 바를 몰라 문 앞에서 망연자실하여 문고리만 부여잡고 있던 선준 옆으로 거대한 낫이 문을 뚫고 들어왔다. 곧 문이 부서질 것 같았다. 선준은 일령도 없이 수백의 망령과 마주할 판이었다. 대왕 도깨비라도 나타나 주면 좋겠다는 요행도 바랐지만 행장이는 깊은 악몽을 헤매는 중이었다. 말로만 들었던 이중 결계가 이토록 강력하고 무섭다는 걸 비로소 오늘에야 알게 되었다.


‘꿈 속이지만 이대로 당할 수 없어. 정말 혼을 빼앗길 수 도 있으니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야.. 아악’


문에 등을 지고 입구를 죽을힘을 다행 사수하던 선준의 오른쪽 옆구리를 기어코 문을 뚫고 들어온 곡괭이가 관통했다. 선준은 선채로 짧은 비명을 뱉으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어차피 꿈 속일 테고 지지 않으면 이겨낼 수 있다는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수십 개의 낫과 곡괭이가 문을 연신 두드려대고 있었다. 바깥에서 치고 미는 힘이 어찌나 대단한지 결국 문고리의 잠금쇠가 터지듯이 벗겨지고 말았다.


‘제길.. 제길.. 안돼. 여기서 이렇게 끝낼 순 없단 말이다.’


곧 광의 문이 부서지듯 열렸고 선준은 수십의 망령과 귀신 씐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부모의 원수, 행장이 가족의 원수를 갚는 것은커녕 산중의 악귀들의 결계 속에 갇혀 이렇게 허망하게 생을 마감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꿈속의 결계니 꿈에서 깨면 살 수 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을 품어보기도 했다.


‘탕- 타앙- 탕-!’


문에 깔려 넘어지며 정신을 잃어가는 선준은 바깥에서 우레와 같은 소리가 연신 터지는 것을 들었다. 더 큰 악령 또는 무언가가 나타났다고 생각한 그는 이제야말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악령과 귀신 들린 사람 수백이 바쁘게 오가며 자신과 행장이가 있는 광을 들락날락하는 소리가 들렸다. 귀신을 쫓고 악령을 소멸시키는 축귀를 업을 삼은 그였지만 온몸이 공포로 사로잡혀 도저히 두 눈을 뜰 수 조차 없었다. 그 순간,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도 출생의 비밀이 밝혀져 부모가 누구인지 알게 된 것만 해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행장이를 생각하자 갑자기 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자신만 믿고 따라오라며 자신만만하게 내뱉은 호언을 뒤로하고 일령 없이는 아무것도 못한 채 이렇게 끝나버리는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부끄러움과 행장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뒤섞인 울음이었다. 너무나 무서웠고 너무나 미안했다. 여전히 사방은 시끄러웠고 혼백이 지나갈 때 나는 특유의 공간을 할퀴는 소리와 진동은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다. 선준은 온몸이 얼어붙어 버린듯 꼼짝할 수 가 없었다.


‘나약해. 이렇게 나약해 빠져서 무얼 복수를 하겠다고.. 젠장, 행장아 미안하다. 너를 지키지 못한 나를 용서해다오. 어머니, 아버지 결국 복수는커녕 이렇게 외지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못난 자식을 용서하십시오. 죄송합니다..’


우레와 같은 소리 이후, 삽시간에 사방이 고요해지자 선준은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제 죽었으니 행장이를 돌아볼 면목도 없었다.


“이제 그만 일어나시죠. 다 도망갔어요.”


그때였다. 선준의 귀를 뚫고 들어온 목소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낭랑한 여자아이의 것이었던 것이다. 선준은 그제야 눈을 떴다. 자신은 여전히 광 속에 누워있었고 다급하게 행장이 쪽으로 돌아보니 행장이 역시 여전히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악몽을 꾼다기보다는 그저 깊고 편한 잠에 빠진듯 보였다. 선준은 배 위의 부서진 문 조각을 치우고 일어나려 했다.


‘아악-‘

“어, 다치셨군요. 문조각 때문에 못 봤는데. 어머, 상처가 꽤 심하군요.”


검은 옷을 입은 여자아이는 선준을 부축하고는 벽 쪽으로 끌고 가 기댔다. 그리고 선준의 두루마기와 저고리를 들추고 속옷을 들춰 피범벅이 된 상처 부위를 살폈다. 곧 아무 말 없이 허리춤의 보자기에서 약초를 몇 개 꺼내 짓이기더니 상처에 대고는 저고리로 허리를 둘러 감싼 뒤 옷고름으로 꽉 묶어주었다.


‘아아악-‘

“엄살이 심하시네요. 겨우 동네 귀신들이 무서워 바짝 긴장하신 걸 보고 겁이 많다 생각했는데 어련하시겠어요.”


잠에서 완전히 깬 선준은 고요해진 사방을 둘러보았다. 너무 평화롭고 고요해서 방금 전까지 공포에 떨던 자신이 더 부끄럽게 여겨졌다. 이에 선준은 밤 사이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자초지종을 설명하려 했으나 갑자기 나타난 여자아이에게 또 시답지 않게 무슨 설명을 할까 싶어서 그저 입을 꾹 닫고 있었다. 낭랑한 목소리와는 달리 매서운 눈매를 가진 여자아이는 선준을 흘끗 보며 살짝 웃어 보이더니 이내 표정을 감췄다. 검은 조끼와 바지를 입은 모양새가 필시 이름 모를 무직에 있거나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는 어사 졸의 복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천민 중 하나일 텐데 선준이 만난 천민 중 이토록 당당한 표정을 한 자를 본 적이 없었다. 제아무리 서방과 교류가 생겨나는 시대라고 해도 이런 복장이 아직 쉽사리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다행히 내장은 다치지 않았으니 며칠간은 이대로 지내셔야 합니다. 그럼 전 제 일이 바빠서 이만.”

“자, 잠깐만.. 이보시오. 윽-“


검은 옷의 여자아이는 선준이 부르는 소리는 들은 채 만채 그렇게 홀연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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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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