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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oney Kim Mar 13. 2023

더 글로리 파트 2: 약한유대와 강한연대 사이에 핀 꽃

너의 낙화와 나의 개화의 이유는 차고 넘치니까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기에, 가장 좋은 복수는 그저 내가 이를 이겨내고 잘 살아가는 것이기에, 어차피 한 번의 응징으로 깨끗하게 세탁될 인성 따위는 애초에 없었기에’, 복수는 옳은 방법이 아닐까. 과거사에 대한 분노의 복수는, 누군가 사회적인 구조 속에서 대신 치를 것이니, 기도와 용서로 다시는 마주치지 않길 바라는 나약한 기대심으로 곪을 대로 곪아 언제 터질지 모르는 딱지 위로 그저 기가 막히게 흡수력이 좋은 밴드를 너덜하게 덧대어 붙이기만 하면 되는 걸까.

그렇게 또 동일한 수법으로 ‘더 끔찍한 폭력을 자아낼 미래의 개차반’이 길러지도록 이대로 둬도 괜찮은 걸까.



복수는 끝났다. 열여덟 과거, 그녀의 일상과 미래의 꿈을 짓밟은 자들을 응징하고 다시 그녀를 그 시절의 꿈꾸던 동은으로 되돌려 놓기 위한 복수가 마침내 끝이 났다.


그런 그녀에게 복수 이후 그녀가 되찾을 일상이 행복할 것인지 묻는다. 행복..? 문득, 나도 궁금해졌다. 이토록 지루한 기간을 처연하게 건너와 처절한 복수를 한 동은이 그토록 바라던 게 과연, ‘행복’이라는 단어 하나로 끝이 맺어질 정도로 단순한 감정이었나, 애초에 동은의 행복, 아니, 누군가에게는 그저 지루할 정도로 평범하여, 때론 어느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을지도 모를 일상의 기억조차도 ‘끔찍한 고통과 이에 대한 복수’로만 가득 찬 과거를 안겨준 그들로부터 동은이 되찾을 것이 ‘행복’이라는 단어 하나로 가득 채울 만큼 충분할까.



동은에게 그저 행복의 회복은 처음부터 복수의 목적이 아니었다. 동은이 바랐던 건 그녀가 지나온 지난 18년의 지옥 같은 하루하루의 끔찍한 고통 속, 매일같이 밟고 지나간 가시밭길에서 느낀 모멸감, 자괴감, 비참함 그리고 이윽고 이어진 자기 파괴적인 감정으로 인한 자살의 문턱까지 걸어갔다 돌아온 ‘한 어린 소녀의 일상’이 그저 앞으로 오래도록 그들에게도 똑같이 펼쳐지길 바랐을 뿐이었다. 이런 지옥불 속에서 동은이 그토록 바라고 기다려 되찾고 싶은 감정이 과연 ‘행복’이었을까. 설사, 그렇게 한다고 한들 복수 이후에 동은은 진심으로 안도와 위안의 한 숨을 내쉴 수 있을까.


그날이 오면, 그때서야 비로소, ‘건축학도’를 꿈꾸던 열여덟의 동은이 다시금 기대할 수 있는,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하루하루 버틸 수 있는 평범한 하루가 시작될 수 있기에 이를 되찾기 위한 복수의 목적을 단순히 '행복'이라는 단어 하나로 치환하기엔 턱없이, 한없이 부족하다.


유대와 연대


끈과 띠라는 뜻으로 서로를 연결하거나 결합한다는 의미를 가진 유대(紐帶).


약자에 대해 얕보는 마음, 괴롭히는데 이유가 없다는 무지성, 가해와 범죄의 민낯이 드러남에도 기어이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야 마는 후안무치의 결정체. 이에 대한 농도와 채도의 짙기가 다를 뿐, 공통의 목표인 약자를 괴롭히는 와중에도 펼쳐지는 그들만의 우열 리그는 처음부터 나약하고 헐겁게 연결된 가해자의 치졸한 유대를 보여주었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서로 같은 마음을 느끼며, 상호 간, 공통적으로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연대(連帶).


같은 아픔, 같은 상처 혹은 출처는 같지 않더라도 출처의 작자를 찾아 응징할 가장 완벽한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 사이에서 본능적으로 느끼게 되는 동질감. 동은은 복수의 과정에서 끈과 띠가 없던 사람끼리 만나, 오히려 더 강력하고 정의로운 띠로 묶이며 더 깊은 유대감으로 젖어들었다.



연진을 필두로 엮여있는 가해자 집단에도 유대는 있다. 서로 비슷한 수준의, 어느 정도까지 최악으로 치달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들은 서로 필요악이라는 필요성으로 서로를 근처에 두고 항시 아슬아슬한 경계를 오가며 긴장된 관계를 유지한다. 악의 유대는 정확하게 약육강식에 가깝다. 하지만, 이들의 약육강식은 생태계에서 논하는 ‘생의 지속과 연장’을 위한 자연의 결정에 따른 약육강식이라기보다는, ‘자신이 불리할 때, 자신에게 대들 때, 자신이 선한 선을 넘을 때’ 기어이 짓밟거나, 누명을 씌우거나, 희생양이 필요할 때 ‘사용해 먹는’ 용도로써만 작동한다.


이들의 유대에는 혈육의 정도, 위아래도, 정이나 의리도,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다. 이들의 관심은 그저 ‘나의 이익, 나의 욕심 그리고 나의 목숨’에만 집중되어 극단적인 자기중심적 사고관의 끝을 보여준다.


동은을 중심으로 모여든 피해자 집단에는 연대가 있다. 각자 피해를 입은 상황과 정도와 현실적으로 이를 대응하는 자세는 다르지만, 이들은 서로의 아픔을 무기로 삼지 않고, 그들을 위해 나의 무기와 시간을 기꺼이 희생하며 도와준다. 이들은 때로는 혈육보다 더 끈끈하고, 우정보다 훨씬 강력한 의리를 보여주며, 진심으로, 그저, 정의가 승리하기만을 바란다. 그리고 그들은 그 안에서, 그것이 설사 자신의 승리는 아니더라도, 동일한 종류의 승리를 맛보고, 언젠간 다가올 자신의 승리를 다짐한다.


이들의 연대는, 상처받기 쉽지만 잘 이겨내고, 무너질 듯하다가도 무너지지 않으며, 혹여, 나로 인해 나를 돕는 이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 서로 희생하며 노심초사한다.


복수의 딜레마, 새로운 피해자


복수의 과정이 모든 이에게 유쾌한 동의를 얻을 순 없다. 하도영과 하예솔은 간접적인 동은의 조력자이자 피해자다. 하도영은 가족이 붕괴되며 명예를 잃었고, 예솔은 엄마와 친구들을 잃었다. 하지만 동은의 복수 덕분에 ‘박연진’이라는 괴물 가해자의 끔찍하리만치 잔인한 과거와 표독스러울 만큼 뻔뻔한 현실의 양면을 벗겨내 보여주었고, 멀지 않은 미래에 어차피 밝혀질 연진의 본모습을 미리 보여주며 그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릴 시간과 기회를 주었으니 괜찮은 걸까.


가장 현실적인 피해자, 경란


경란은 가장 현실적인 피해자의 전형이다. 모든 피해자가 동은과 같은 용기를 낼 수 없고, 설사 그랬다고 하더라도 시간과 돈의 무게 앞에 스스로 포기하게 마련이다. 피해자들에게 가장 두려운 현실은 ‘역고소, 2차 가해’ 그리고 혹시라도 ‘막대한 자금과 사회적인 위치’를 내세워 역으로 피해자의 용기를 압박하고 협박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피해자는 또다시 절망할 수밖에 없다.


가족은 정말, 가장 가깝고 가장 큰 가해자일까



연진은 동은에게 습관처럼 ‘네 삶의 가장 큰 가해자는 가족(동은의 엄마)’이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자신은 또 교묘하게 죄의식에서 빠져나가며 가해의 책임에서 달아난다. 참 안타깝게도, 연진과 일행의 학폭과 관계없이, 동은의 엄마는 동은의 삶이 이지경이 되도록 환경적인 원인을 제공한 가해자가 맞다. 그리고 파트 2에서는 푼돈에 자식을 팔아넘기며 직접 나서서 동은을 끌어내린다. 그런데 말이 씨가 되었을까, 연진의 몰락에 연진의 엄마 역시 등을 돌린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딸을 넘긴 것은 물론, 교도소 안에서 마주친 딸의 울분에 미동조차 않는다. 더 이상, 지평건설의 사모님도, 기상캐스터도 아닌 딸은 더 이상 자신의 안위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대로, 악의 유대는 이토록 간사하고 얄팍하다. 피해자 연대의 중심이 ‘상대방에 대한 배려’에 있다면, 가해자 유대의 중심에는 항상 ‘자신’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집단 중 가장 기본 단위이자 작은 사회인 ‘가족’에게 감히, ‘가해자’라는 잣대를 드리울 수 있을까. 살다 보면 부모가 자식에게 모질게 혼을 내거나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훈육을 하기도 하고, 자식이 부모에게 의미 없는 반항이나 감정적인 소모로 부모의 가슴에 크고 작은 못을 박기도 한다. 이로 인해, 부모가 다투거나 심하게는 갈라서기도 하고, 자녀들은 가출이나 묵언 등 경우에 따라 극단적인 양상으로 치닫기도 한다.


하지만,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식적인 수준의 기준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의 범위 내에서 발생한 건들에 대해 가족을 가해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비록, 가족이 ‘나’를 힘들게 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는 ‘사랑과 관심’을 기반으로 하기에 우리는 감히, ‘가해자’라는 단어를 가족에게 쓰지 않는다.


‘가족이 가장 큰 가해자야!’ 역시, 연진이라는, 상식과 정의와 배려의 기준에서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가능한 문장이었다.


일상의 영광은 다시 시작되어야 하니까



마침내 복수는 끝났다. 하지만 동은의 곁에는 그녀가 도움이 필요할 때 함께 망나니 칼춤을 쳐준 동병상련의 피해자(여정)가 있다. 그리고 동은은 그의 선의가 담긴 도움에 대한 보답을 저버리지 않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갈 길을 잃은 동은에게 여정의 복수는 어쩌면 새로운 희망이다. 여정의 고통을 복수의 희망으로 개화시키기 위한 ‘피해자 연대’의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모든 이들에게 ‘평범한 영광’은 당연히 누려야 할 일상의 호사다. 우리는 너무나 일상적이라 당연히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 여긴 ‘평범한 영광’을 빼앗겼을 때 분노한다. 동은이 그러했듯, 여정이 곧 그러하듯, 우리의 관심과 응원은 언제까지나 ‘피해자의 연대’를 향할 것이다.


그들의 평범한 영광의 실현이 곧, 우리네 평범한 삶들의 정의 구현을 의미하기에.



[이미지 출처]

https://m.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303101604005#c2b

https://m.ajunews.com/amp/20230118164657584

http://m.tf.co.kr/amp/entertain/2002266.htm

https://m.blog.naver.com/ameliepink/223030375417?isInf=tr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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