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영우를 통해 발견한 이분법적 사고관의 종말
국가적 민족성, 집단적 유사성, 가계적 합일성을 떠나 우리는 누구나 한 사람으로서 보편적인 특수성을 가진 존재이며 집단에 속해있는 동시에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하나의 개체다. 이는 뛰어난 천재, 장애를 가진 사람, LGBTQ로 분류되는 성소수자, 육식을 제한하는 비건 등 제도권 내에서 뚜렷하게 구분되는 사람들만이 소수가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특정 종교, 신념, 직업은 물론, 음식, 음료, 책, 예술품 등을 좋아하는 취향을 가진 것만으로도 우리는 소수자가 될 수 있다. 즉, 누구나 이미 어느 장소, 분야 또는 취향에서는 소수자 중 하나라는 말이기도 하다.
소수는 수적인 열세 때문에 다수에 비해 영향력이 없는 듯 하지만 사실, 역사적으로 모든 중대한 문제와 변화는 모두 소수의 판단에 의해 결정되었다. 개인이 집단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 같지만 이미 집단의 색은 소수의 결정에 의해 시시각각 변화해왔다. 이는 소수가 인류사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살펴봐도 알 수 있다.
뛰어난 천재들이 있었다.
소위 위인으로 불리는 자들이다. 이들은 인류 역사에서 따져보면 매우 극단적인 소수이지만 문학, 과학, 정치, 경제, 전쟁, 종교 등 특정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으로 발명과 발견을 하고 위대한 업적과 기록을 남겼다. 덕분에 인류의 문명은 단기간에 급속도로 발전했고 오늘날에 이르렀다.
전쟁도 그랬다.
독일의 소수당이었던 나치당이 사람들을 선동하지 않았다면 2차 세계대전도, 유태인 학살도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광기에 집착한 소수의 사람들 때문에 수천 만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근대 중국과 일본의 사례도 마찬가지다. 평화로운 대다수의 중국, 일본인들과는 상관없이 당시 정부의 그릇된 판단으로 수천만 명의 목숨이 사라져 갔다.
이슬람교도들은 어떠한가.
통계적으로 75%에 달하는 대다수의 이슬람인들은 평화로우니 이슬람교도들에 대한 공격적이고 차별적인 대우를 거두라고 한다. 하지만 극단적인 테러를 벌이는 소수의 무슬림들이 그들의 광적인 신념과 사상으로 인해 벌이는 행동들은 위험하다. 평화로운 다수의 무슬림들은 상관없다는 말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성서는 백 마리의 양 중 울타리에 들어간 안전한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찾는데 더 집중한다. 안전한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도 언제 길 잃은 한 마리의 소수가 될지 모르기에 현재 안전한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 길 잃은 소수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생물학적 진화도 비슷하다.
진화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무수한 자연선택적인 결과물들이 세대에 세대를 거듭해 탄생하는데 어느 한 세대의 어느 지점에 지배적인 생물학적 형질과는 다른 극소수의 특이한 개체가 발견되기도 한다. 우리는 이를 돌연변이라고 부른다. 이로 인해 종은 더욱 다양해지고 덕분에 건강한 개체들이 늘어나게 된다.
어느 지점에서 소수는 극단적이고 공격적이며 맹렬하다. 하지만 또 다른 지점에서 소수는 진취적이고 개혁적이며 발전적이다. 소수의 양극의 날 덕분에 세상은 엎치락뒤치락 마치,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트위스트가 인류사를 이끌어온 것처럼 극적인 균형을 이루며 현대에 이르렀다.
이런 소수의 개념을 한 개인의 관점으로 가져와보자. 우리는 민족적, 종교적, 국가적, 집단적, 가계적으로 각기 다른 기준을 가진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 구조 안에서 살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를 관습, 관념, 도덕, 윤리와 같은 사회적 기준을 매우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며 안전한 울타리 내에서 살아가는 정상 범주의 사람이라고 굳게 믿으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윽고 궁금해졌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모든 기준을 지키며 ‘노란색 안전선 뒤로 물러나’ 정도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을까.
장애인들의 시각에는 비장애인에 가깝고, 일반인들의 시각에는 장애인에 가까운 사람,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인정하고 싶든 아니든 사회 속 우리 모두는 마치 우영우와 같다. 우리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음과 동시에 어디에나 속해있다. 세상에는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지만 돌아보면 나 역시 어떤 사람들에 비해서는 비교적 뛰어난 사람이다. 그런 관점에서 우영우 역시 어느 한 곳에 편안하게 속할 수 없는 가혹하고 외로운 처지에 있다. 만약, 우리가 그녀의 특수성에 집중하지 않고 그저 이 시대의 한 사람으로서 바라본다면 그녀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여전히 특별하게 눈에 띄는 사람일까.
집안
아버지 손에 자란 외동딸.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전혀 모른 채 성인이 되었다. 아버지의 지극 정성의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기준에서 불안정한 가정이었다.
학창 시절
왕따를 당했고 매번 놀림만 받고 살다가 이를 도와주는 운명적인 친구를 만났다. 대중의 이해와 공감을 얻는 경험이 없었지만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친구의 관심과 사랑을 얻었다.
스펙
서울대학교 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인재다. 모든 로펌이 탐낼 만한 사람이다. 로스쿨 수석 졸업 자체로 이미 모든 스펙은 다 갖췄다.
직장
국내 2대 로펌에 로펌 대표의 추천으로 입사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특채보다는 부정 입사에 가까워 보인다. 로펌에 들어가기 위해 수년을 노력한 타 경쟁자들의 노력을 무시한 처사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여기에 이제 가장 현실적인 팩트를 추가해보자.
우영우,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자폐를 가진 사람’
단 하나의 팩트가 추가되었지만 그녀의 현실을 알고 나니 위 네 가지 사실이 달리 보인다. 소수를 향한 사회적인 편견과 본능적인 배려가 자동으로 작동된다. 이해심이 강요되고 조심성이 추가된다. 소수를 향한 우리의 모든 긍정적, 부정적 행위들이 자연스레 변호된다.
과연, 그녀는 그녀의 타고난 특수성으로 인해 극단을 오가는 타인의 감정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불편함을 가진 사람을 돕고 싶어 한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가족은 물론이고 가장 친한 친구인 동그라미, 가까운 동료인 최수연, 직장 상사인 정명석이 그러하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배려'하지는 않는다. 인턴 동기인 권민우는 그녀의 극단적인 안티로 소수자가 얻는 배려와 혜택에 대한 시기심으로 똘똘 뭉친 일그러진 가치관을 가졌다. 그리고 그런 그의 시기는 그녀의 처지에 대한 ‘무시’에서 비롯되었다.
중요한 사실은 최수연도 권민우도 그녀가 ‘자폐’라는 ‘소수’ 그룹으로 분류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의 행동은 '배려와 무시'로 나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수연은 ‘봄날의 햇살’처럼 언제나 정의로운 사람이고, 권민우는 ‘권모술수’로 대표되는 시기의 아이콘일까.
우리는 우영우를 보며 묘한 기분에 휩싸인다. 우영우를 통해 ‘보편적 기준에 속한 보통 사람'이라는 상대적 안정감을 느끼기도 하고 '우영우와 같은 소수자'를 보며 배려와 동정의 감정을 가지기 도하지만, ‘우영우와 같은 특별한 능력’을 보며 소리 없는 질투심에 가득 차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우영우가 우리에게 던지는 시사점은 극단적으로 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장점보다는 단점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우영우의 뛰어난 두뇌’를 부러워하지만 사실, 그것보다 ’우영우가 속한 소수에 속하지 않았음’에 조금 더 안도를 느낀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안도감만큼의 공간은 배려, 동정과 같은 마음으로 채워지게 된다.
놀랍게도 '배려와 무시'라는 소수자를 향한 극단적인 시각은 한 배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이 둘의 생물학적인 유전 형질의 극명한 차이로 인해 드러난 말과 행동이 극단적으로 다르기에 우리는 이를 ‘배려’와 ‘무시’로 구분하게 되었다.
사실, 모든 소수자가 어려운 상황에 놓이지 않는다. 어떤 소수자는 역사적, 사회적으로 권력이 넘쳤고, 특혜를 누렸으며, 모든 이들의 추앙을 받는다. 마치 ‘배려’처럼. 어떤 소수자는 태어날 때, 혹은 특정 시점부터 무시당하고, 홀대당하며,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많은 이들의 눈총을 받는다. 마치 ‘무시’처럼.
후자에 속한 소수자는 자신이 선택했든 타고났든 자신이 속한 상황의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도움을 받거나 스스로 방법을 찾아야 한다. 중요한 사실은 외부의 도움은 제한적이지만 나의 노력은 지속적이라는 점이다. 결국, 스스로 사회가 용인하는 기준 내에서 합리적인 방법으로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변호해야 한다.
우영우의 에피소드들을 돌아봐도 그렇다. 피해자든 가해자든 어느 한 곳에 속하는 순간 우리 모두는 소수자가 된다. 소수자가 되는 순간 시야는 좁아지고 불편이 늘어난다. 대중의 이해와 배려를 받기 쉽지 않다. 특히, 법의 테두리 내에서 소수자가 되는 순간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판사의 이해와 의사에 따른 처분을 기다리거나, 해당 사건에서 벗어나기 위해 변호사와 함께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 밖에 없다.
대부분의 소수자는 강력한 힘을 가진 쪽보다는 약하고 소외받는 경향이 강하다. 약자는 제외되고 무시당하는 확률이 높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수자'앞에 가해자이자 피해자일 수 있다. 따라서, 결국, 나도 어디에선 가는 소수자임을 인정하고 이에 따른 ‘배려’와 ‘무시’를 감당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소수임을 망각하거나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따른 편견에 날이 서서 맞서겠다고만 하는 건 나 혼자 세상의 기준을 바꾸겠다는 선언을 하며 대양에 던진 작은 돌멩이에 불과하다.
이에 관한 우영우의 삶의 단면을 몇 조각 훑어보자. 그녀는 지금까지 소수자로서 어떤 날들을 지나왔을까.
서울 법대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해도 6개월간 취업을 못했고, ‘자폐’라는 불편함이 장애물이 되기도, 특혜가 되기도 한 양면성을 겪었다.
변호사로서 법정에서 변호를 할 때마다 보통 사람과 자신의 다른 점을 지속적으로 밝혀야 했다.
같은 장애를 가지고 있어도 훨씬 상황이 낫다는 사실 때문에 질투도 받았다.
동료와 현장을 다녀도 봉사를 받는 사람으로 비치는 오해도 있었다.
자신의 차이 점으로 인해 쉽사리 마음을 열지 못하는 상대방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이를 이렇게 극복했다.
자폐 때문에 서류에서 탈락한 회사에, 자폐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실력으로 특채 입사했지만, 그 사실을 알고 스스로 퇴사를 결심하고 행동에 옮겼다.
숨길 수 없는 이유라면 언제라도 당당히 소수자임을 밝히고 그 지점부터 문제를 해결해나갔다.
질투는 정면으로 받고 오해는 면전에서 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절하지 않았다.
사랑 앞에 적극적으로 먼저 다가갔고, 행동했으며, 고백했다.
우영우는 마냥 다수에만 속해있다고 착각하는 우리들에게 어느 날 소수에 속해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소수자로서 취해야 할 말과 행동에 대한 모범 답안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현실을 직시했고, 차이와 차별을 구분했으며, 소수자라는 자신의 상황을 탓하며 매몰되지 않았다. 오해와 갈등은 마음에 품지 않고 사람들과 슬기롭게 대면하며 풀어냈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였다.
'우리는 소수니까 이해하고 받아달라는 응석이나 칭얼거림은 어디에도 없다. 그저, 인정하고 먼저 다가가 스스로 매듭을 풀었다.'
비록, 우영우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우리 모두의 상황과 역할은 시시각각 변한다. 어제는 다수에 속했지만 내일은 소수에 속할 수 있다. 대부분, 소수에 속하는 순간 눈에 띄는 약자의 포지션이 된다. 하지만 우영우가 보여준 순수한 용기와 결단은 이 시대, 사회 속에서 소수자로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슬기롭게 일러준다.
이는 ‘소수이지만 괜찮아’와 같은 패시브 스킬이 아니다. ‘소수임에도 불구하고’와 같은 액티브 스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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