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법

낡은 상처와 새로운 남자 4/4

by 뿌리와 날개

더 울으라니…?


그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의자에서 몸을 뒤로 빼고는 팔짱을 끼고 나를 쳐다봤다.



“울어. 많이 울수록 좋아. 실컷 울어.”


“뭐야. 흑흑. 그게 무슨 말이야아아….”


“그때 못 나온 감정이 이제 나오는 거니까 바닥날 때까지 쏟아내라구!”


“못 나온 감정이라니! 이미 살면서 울 거 다 울고, 화 낼 거 다 냈는데! 그때 안 나왔으면 없는 거지. 무슨 있지도 않은 감정이 6년 만에 튀어나와. 그리고 나 그렇게 멍청한 사람 아니야. 억지로 감정을 억눌러서 곪아 터지게 둘만큼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구!”



그때 못 나온 감정? 내가 그 당시에 여자로서 받은 상처가 있었다고? 그런데 그게 6년 동안 전혀 느껴지지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쓰나미처럼 밀려온다고???


쌓여있는 게 없는데 튀어나올 게 어디 있단 말인가. 나는 그의 바람에 비참하다거나 화가 난 적이 없단 말이다!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다.



“아마 지금 네가 느끼고 있는 그 감정들이, 그 당시에는 견디기 너무 벅차서 어디 구석에 숨어있었던 감정일 거야. 당장 그거 말고도 처리할 감정들이 많아서 벅찼을 텐데 그것까지 감당하기는 어려웠겠지. 그러니 그건 멍청한 게 아니라 당시로서는 네가 너를 지켜낼 수 있는 아주 영리한 전략이었을 거야.”








“오늘 이렇게 날 잡은 김에 실컷 울어버려. 그런 감정 쏟아내기에 우는 것만큼 좋은 것도 없으니까. 여러 번 나눠 울 것 없이 오늘 실컷 울고 다 씻어내 버려.”



그는 두 팔을 크게 휘적이며 뭔가를 힘껏 쓸어내는 시늉을 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이 모든 상황과 내가 느끼는 감정, 상황에 맞지 않게 투머치 한 이 감정이 설명되지 않는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는 내친김에 눈물을 더 쏟았다.


속이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


놀랍게도 감정의 근원을 알고 나니 가슴이 아픈 것도, 주체할 수 없던 슬픔도 금세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도 격정적이던 감정들이 3분이 채 되지 않아 사르르 사라져 버리다니….


실컷 울으라던 그 앞에서 조금 머쓱해졌다.








“내 안에 그런 감정이 숨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게다가 그게 난데없이 6년 만에 이렇게 불쑥 나타나다니.”


“다행인 줄 알아, 이제라도 느낄 수 있다는 게. 이젠 네가 숨겨둬야만 했던 그 감정이 튀어나와도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안정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이게 다 뭐야! 너무 찌질해. 나 그동안 정말 괜찮았단 말이야. 남편이 바람피웠다는 걸로 그렇게까지 깊게 상처 받은 적 없어. 그래서 남편을 별로 사랑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까지 생각했다고.”


“그럴 리가. 결혼이 너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아는데, 그런 네가 상처를 받지 않았다고? 오히려 그 반대였을 걸. 상처가 너무 크니까 채 느끼기도 전에 안 보이게 꽁꽁 숨겨버렸던 거겠지. 아직은 네가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해서.”



이게 바로 심리학에서 말하는 억압이었던가보다.


말로만 듣던 억압을 직접 경험하다니. 놀랄 노자다.



“그럼 내가 그 당시에 그 사람한테… 사실은 엄청… 상처 받았었단 말이겠네. 그걸 인정하면 차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그랬겠지….”



6년씩이나 아무것도 못 느낄 정도로 무의식 속에 파묻어 놓고 살았어야 했을 만큼, 그때 나는 그렇게 많이 아팠던 걸까…?








나는 자존감이 높았던 것도 아니었고, 남편의 외도와 나의 매력을 연결 지어 스스로를 비참해할 만큼 어리석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너무 아프고 힘들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남편의 배신이 가장 힘들었어서, 그래서 지금까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 감정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꽁꽁 싸매 억압해왔던 것이다.


상상해보니 이해가 간다. 그때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져 하루하루가 끔찍했던 시간들….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던 그 와중에 바람난 남편 생각에 눈물까지 지어야 했더라면….



“그렇게 아팠는데, 그럼 왜 벌써 괜찮은 걸까? 나 이제 다 울었거든.”


“아까 말했잖아. 감당할만하니까 튀어나온 거라고. 6년 동안 잘 묻어둔 덕에 이제 그 격렬했던 감정이 많이 약해지고, 그 대신 네 마음은 많이 단단해져서 이제는 그 감정에 직면해도 괜찮을 것 같으니까 나온 거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용하는 단어며, 말투며, 목소리에 눈빛까지 나를 콕콕 찌르고 상처 주던 그의 모습이 갑자기 너무나 인자하게 보였다. 다시 내가 알던 다정한 그의 모습이었다.


그건 그렇고, 나에 관한 거라면 그는 정말 모르는 게 없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다 알아, 매번?”


“엄마 덕에 그룹치료에 몇 년간 참여한 걸 감사하게 여겨야지. 한 달에 한 번씩 열명 가까운 사람들의 고민을 쫙 듣는 일을 몇 년 하다 보면, 다 보이게 돼있어.”


“항상 느끼지만 넌 정말 정서지능이 높은 것 같아. 내적으로 단단하기도 하고. 고마워, 도와줘서.”


“별말씀을! 내가 남자 친구라는 걸 고맙게 생각해. 다른 남자 같았으면 넷 중에 셋은 벌써 저만치 도망갔을걸! 이 여자, 아직도 과거 속에서 울고 있다고!”



그는 능청스레 허우적거리며 도망가는 시늉을 했다. 나는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하는 그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그는 나를 잡아당겨 따뜻한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고는 한참 위에서 내려다보며 말했다.



“Ich liebe dich sehr sehr. (나는 너를 아주 많이 사랑해.) 그리고 나는 네 전남편이랑 다른 사람이야. 그도 남자고, 나도 남자니까 남자들이 가진 비슷한 특징 같은 게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하지도 않은 일로 너에게 미움을 받는 건 내 입장에선 너무 억울해."


"알아. 너를 그 사람하고 착각하거나 그런 거 아냐. 그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아. 아는데... 그렇게 느끼게 해서 미안해."


"그런 게 네 신경을 거스른다면, 그건 내가 어쩔 수 없어. 그건 네가 극복해야 할 문제야. 하지만, 네가 무슨 옷을 걸치고 있든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어. 너는 나한테 언제나 최고로 아름다운 여자야.”



그리고 그는 내 이마에 뽀뽀했다.








사랑이 지나고 난 뒤 혼자 있을 때 할 수 있는 내적인 성숙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할 수 있는 내적인 성숙이 또 따로 있다.


6년 만에 내가 이런 감정을 터트리게 된 것도 어쩌면 지난 일 년 간 그가 성실히 내 곁에서 함께 걸어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 안에서 꽁꽁 숨어버려 어쩌면 평생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을 이 감정에, 일 년 만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 것.


내가 여전히 혼자였다 거나, 그가 아닌 다른 남자가 곁에 있었더라면 이렇게 빨리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과거의 기억과 상처로 아파하는 게 비단 나뿐일까.


사랑하고 이별해 본 우리는 모두 상처투성이이다.


그에게도 역시 그런 상처가 있다. 상처의 결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아픔을 느끼는 상황도 서로 다를 뿐이다.


연애 초에 그 역시 전 여자 친구들과의 경험과 아픈 기억을 나에게 투영해 힘들어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가 힘들어하는 부분이 다행히도 내가 감정적으로 꼬여 있거나 얽혀있는 부분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그를 대하는 것이 썩 어렵지 않았다.


이빨을 드러낸 야수 같은 모습에 두렵기도 했지만, 침착하게 가만히 등을 어루만져주자 그는 이내 잠잠해졌다.


그렇게 감정이 가라앉고 나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 뒤로도 몇 번의 비슷한 경험을 통해 그가 가진 상처를 더 자세히 이해할 수 있었다.


상처가 자극받으면 나오는 그의 반응들을 보며 그의 마음을 다독이는 법을 하나씩 배워갔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했던가.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지도 모른다.


내게는 뜨거워 어쩔 줄 모르겠는 이 상처가 그에게는 만질 만하기에 그가 어루만져 줄 수 있는 것이고, 그가 차마 만지지 못하는 그의 뜨거운 상처는 또 나에게 만질 만한 것이라 내가 어루만져 줄 수 있는 것.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서로에게 “사랑한다”라고 표현하는 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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