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내가 그 당시에 독일에 남았던 이유

by 뿌리와 날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 당시 그렇게 고생스러웠으면서도 독일에 남은 이유에 대해서 궁금해한다.


이혼 뒤의 상황을 세 권의 책으로 엮은 뒤로는 성실하게 완독을 하고 이 질문하는 사람들이 더 늘고 있다. 아마도 책에는 자세히 쓰여있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오랫동안 꾸준히 받아온 질문인만큼, 오늘은 한번 대답을 해볼까 한다.








가장 큰 이유는, 그 당시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독자들이 세 권의 분량으로 이야기를 읽다 보니 이것이 굉장히 오랜 기간이었다고 착각하는 것 같다.



독일 남자와 이혼하기 1편 https://brunch.co.kr/brunchbook/frechdachs10

독일 남자와 이혼하기 2편 https://brunch.co.kr/brunchbook/frechdachs20


이 두 권의 분량은 남편과 헤어진 직후 보호소에서 지내며 두 달간 집을 구해서 독립하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독일 남자와 이혼하기 3편 https://brunch.co.kr/brunchbook/frechdachs30



3편까지 합쳐도 이혼을 결정하고 4개월 남짓의 시간밖에 안된다는 뜻이다.


남편과는 2015년 4월 중순까지 평범하게 살았고, 아기와 한국으로 쫓겨난 뒤 6월 초순까지 두 달 동안 나는 독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남편이 갑자기 왜 저러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남편이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것도, 그래서 우리와 헤어지기로 결심하고 우리를 한국으로 보냈었다는 것도 6월 중순에 독일로 돌아온 뒤 열흘 간 남편과 함께 지내며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러니 당시로서는, 남편이 헤어지잔다고 3년 간 살던 나라를 열흘 만에 정리해 바로 짐을 싸들고 아기와 한국으로 들어가는 게 더 어불성설이었다.








그다음 이유로는, 아직 이혼 소송이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독일어도 못하고, 독일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내가 당시에 보호소 대신 한국으로 돌아갔더라면 나의 혼인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서류 정리도 하지 못하고, 양육비도 받지 못하고 아무것도 정리하지 못한 채로 한국에서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만약 그러다가 몇 년 뒤 내가 아이와 다시 독일로 돌아오기라도 한다면? 당시에 처리하지 못했던 서류 문제로 골치 아팠을 것이다. 이혼 소송이 마무리될 때까지는 어찌 되었건 독일에 머물러야만 했다.


국제커플이 이혼을 하면, 이렇게 된다.


이혼 소송이 끝날 때까지 개고생을 해가며 타국에서 버텨내던지, 아무런 권리도 찾지 못한 채 다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던지.


독일에서 버티고 변호사를 선임해 정당하게 싸워보려 해도 그럴 권리조차 없는 경우도 많다. 우리는 외국인의 처지이다 보니.


실제로 이혼을 계획한 많은 독일 남자들이 비자 만료일까지 숨죽이고 있다가 날짜에 맞춰 갑작스레 혼인 관계를 청산해버려 한국인 아내를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만들거나 독일 입국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방법 등으로, 정당한 재산 분할 없이 재산상의 모든 이득을 일방적으로 취하고 호적을 정리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내 남편의 당시 계획 역시 "내가 겁먹고 아이와 다시 독일로 돌아오지 않아 재산분할이나 양육비, 내가 자립할 때까지 생계보조를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내가 돌아오는 바람에 그 야무진 꿈이 망가져버린 것이고.


나는 이혼 소송이 마무리될 때까지 독일 땅에서 버텨 정당한 내 권리를 찾고 싶었고, 마침내 찾았을 뿐이다.


내가 그때 포기하지 않은 덕에 지금 내 아이는 직업교육을 받게 되면 만 18세까지, 대학 교육을 받게 되면 만 25세까지 전 남편으로부터 매달 양육비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양육비는 아이가 자랄수록, 남편의 소득이 높을수록 올라간다. (물론 적정선까지)








마지막으로, 아이의 아버지가 독일에 살고 있다.


책을 읽는 독자들은 아이와 아버지의 연락이 그 이후로 끊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당시의 나는 이렇게 될 줄 몰랐다. 남편이 너무 혼란스러운 상황이라 한몇 달 아이를 안 보려고 하는 줄 알았지 그 길로 다시는 안 보겠다는 말인 줄 몰랐다는 뜻이다.


남편이 얼마나 밉든 그것은 나와 그의 문제이지, 아이에게는 나도, 그도 똑같은 지분으로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준 뿌리와 같다. 내가 그 당시 그대로 한국으로 들어가 버렸더라면 나는 아이와 아버지의 인연을 억지로 끊어버린 게 되었을 것이다.


아이를 사랑하는 어머니로서 전혀 그럴 이유가 없었다. 힘들더라도 할 수 있다면 내가 독일에 머물면서 자리를 잡는 것이 아버지와 아이의 인연을 이어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이혼했다고 해서 아이를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고, 아이를 볼모로 남편을 괴롭히거나 협박할 생각도 없었다. 최선이 안된다면 차선이라도 감사하고 최대한 아이에게 상처를 덜 주고 싶었다.


물론 지금은 그것이 다 부질없는 짓이 되었지만.


하지만, 내가 독일에 남은 덕에 적어도 나와 아이는 남편의 외가 쪽 식구들과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아이는 비록 아버지가 없지만, 아버지의 외증조할머니, 두 명의 이모할머니와 세 명의 할아버지에게 사랑과 예쁨을 받으며 살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이 점이 내가 참 잘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다.








이 세 가지가 가장 중요한 이유였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부수적인 이유들이 있었다.


아이가 독일인 아버지를 둔 이상 언젠가 자라면 뿌리를 찾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대로 한국에 돌아가면 아이나 나나 독일어를 못하게 될 테니까 나중에 힘들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아이가 언젠가 한 번은 아버지를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눠야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때 언어의 장벽 없이 허심탄회하게 대화할 수 있기를 바랐다.


또 한국으로 돌아가면 나는 “혼혈아를 데리고 직업도, 경력도 없이 돌아온 서른 살의 이혼녀”가 된다.


요즘은 옛날과 달라졌다며 한국도 살만하니 돌아오라는 댓글도 꽤 있었지만, 그중에 “나도 애 데리고 혼자 사는데”라는 싱글맘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당시 내가 힘들어서 한국에 가고 싶어 할 때면 실제로 한국에 살고 있는 싱글맘들과 한부모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이 부지런히 댓글을 달아주었다.


그들의 현재 한국에서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 그러니 돌아오지 말고 거기에 사시라고.


한국에서 아빠 없는 혼혈아로서 아이가 받을 시선, 갓 서른밖에 안 된 이혼녀인 내가 사회에서 받고 겪어야 할 수모들, 나의 경제력과 부족한 것들을 메워줘야 했을 나의 가족들…….


무엇보다 한국에서는 서른 넘은 애 딸린 이혼녀가 밑바닥부터 성장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혼을 하고, 독일에서 스스로 성장하는 경험을 하며 나는 나의 가능성을 보았다.


한국보다는 독일이 나를 키워줄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새로운 사랑을 하고 싶어 졌을 때에도 독일이 한국보다 훨씬 자유로울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내가 지금 이 개새끼로 인해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졌더라도 이제 갓 서른인데 남은 인생을 평생 혼자 살아가진 않지 않겠나 싶었다.


그래서 언젠가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 졌을 때 아이가 있다는 이유로, 이혼을 했다는 이유로 위축되고, 사회나 남자의 가족들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고 싶지 않았다.


독일에서는 볼 수 없는 한국만의 정서, 애 딸린 이혼녀 주제에 남의 집 귀한 아들을 홀린 여우 같은 년… 이 되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아빠 없이 자랄 내 아들, 내가 사랑을 찾았다는 이유로 또다시 눈치 보며 자라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나와 아이의 당당한 삶을 위해서 독일에서 버텨보기로 했던 것이다.


또, 한국은 내 나라이니 내가 언제든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생각 역시 지금도 유효하다.


내가 여차저차 한 연유로 6년째 독일에서 버텨내고는 있지만, 사실 나는 아직도 내가 어디에 정착해서 살지 정하지 못했다. 다만 그날그날에 충실히 살뿐이다.


한국에 돌아갈 때 돌아가더라도 아이가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에서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을 만큼 단단해졌을 때 돌아가고 싶다.


사람들이 어떤 상처 주는 말과 눈빛을 던져도 아이가 의연할 수 있을 만큼 자랐을 때, 그때가 한국으로 돌아가도 되는 때라고 생각한다.








나는 사람들이 그 점을 궁금해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 당시 나에게는 이 일련의 과정이 너무나 당연했기 때문에.


이혼 소송이 3년 뒤에 시작될 줄도 그때는 몰랐다. 당시에는 이혼까지 적어도 1년의 별거 기간을 채워야 했기 때문에 1년 정도만 일단 버텨보려고 했다.


그런데 1년 정도 버텼더니 우리를 진심으로 아껴주는 시이모님 부부와 몇몇의 독일 지인들이 곁에 생겼다. 그들은 우리를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우리가 독일에서 자리 잡고 살아갈 수 있도록 조금씩 길을 터주기 시작했다.


그래서 조금 더 버텨보기로 했다. 힘들긴 하지만 2년만 더 버텨서 3년을 채워보자고. 만약 3년 뒤에도 이렇게 죽을 맛이고 힘들면, 그때 돌아가도 늦지 않는다고.


그래서 대학 진학을 목표로 독일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대학에 들어가기까지 그렇게 3년이 걸렸다.


그 와중에 나는 더 많은 친구들이 생겼고, 독일어도 C1까지 따고, 독일의 유치원에서 실습도 하고, 아이도 잘 자랐다.


그렇게 2018년, 별거 한 지 3년 만에 대학에 들어갔고, 내가 대학에 들어가면서 남편은 부양의 의무를 벗어나기 위해 이혼 소송을 시작했다.


2019년 여름, 이혼 소송이 마무리되었고 나는 학업을 계속 이어갔다.


그러다 2020년 봄, 지금의 남자 친구를 만나 교제 중인 2021년 현재까지…


이렇게 나는 어쩌다 보니 지금까지 독일에 살게 된 것이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남자 친구 덕분에 지난 1년 간 생활이 눈부시게 안정되었고, 나와 아이는 비로소 싱글맘의 악순환과 개고생에서 벗어나 사람답게 살아가고 있다.


가끔씩은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한국으로 도망가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의 삶에 만족한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별일 없는 이 지루한 일상을 찾은 지 이제 겨우 1년 남짓이라….


아직은 별 깊은 생각이나 계획 없이 그냥 살고 싶다.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에 행복하고 감사하게.





<이미지 출처>

https://lemondays.de/allgemein/ein-eigenes-buch-schreib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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