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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ot Jun 24. 2023

설렘 상자

DHL

이미 내가 어떤 물건을 샀는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택배 상자를 꽁꽁 잠가놓은 테이프는 호기심을 자극시키기에 충분하다. 이걸 제거하고 상자를 여는 순간, 이상하게도 안에서 빛이 난다. 마치 상자 안에 온 우주가 담겨 있는 듯하다. 잔뜩 밀려 올라가 있던 입가 주름은 진작부터 내가 웃고 있었음을 인지 시켜준다. 행복하다.


처음엔 그저 구매한 물건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본래의 목적을 넘어 패키징 자체로도 충분한 가치를 가진 것 같다. 상자를 뜯는 순간이 몇 분, 아니 몇 초나 될까. 그 짧은 시간 동안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행복함을 느낀다. 속물처럼 금액이 오를수록 행복의 수치도 올라가는 것도 어쩔 수 없다.


2019년에 구매한 애플의 맥북프로가 지금까지 받은 택배 상자 중에서 가장 비쌌다. 사진 작업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다며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리고 600만 원 상당의 금액을 사계절 동안 지불 하기로 결심하고 온라인에서 구매하기 버튼을 클릭했다. 일주일을 기다려 받은 택배상자에 붙어있던 DHL 로고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오밀조밀하게 밀도가 높아 딱 봐도 튼튼한 패키지 디자인이었다. 입구를 틀어막은 테이프를 칼로 조심스레 자르고 박스를 열었다. 너무나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듯한 맥북프로가 그 안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신생아를 다루듯 조심스레 맥북을 꺼내었다.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다.


길가를 지나는 DHL택배 트럭을 보면 여전히 그때 산 맥북 프로 상자를 뜯던 기억이 난다. 저 짐칸에 또 누군가의 맥북이 들었을까. 그게 아니라도 저 노란 트럭이 파란 하늘 아래로 지나가면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 건 받는 사람을 설레게 하는 물건이 실려 있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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