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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ot Scent Sep 23. 2021

11. 고통 없이 죽는 법

아빠와 같이 있는 나날이 채워질수록 미국으로 떠나야 할 날이 다가왔다.


엄마와 교대로 아빠를 간병하던 나는 남들이 말하는 '준비'라는 것을 할 수 없었다. 사실 그것을 하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내렸던 계획은 '가장 고통 없이 죽는 법을 실행하기' 아니었던가. 누군가 비행기 추락사고가 그나마 가장 고통스럽지 않게 한 번에 죽음에 이를 수 있다 말했다. 나도 알고 있었다. 대학원 합격으로 미국행 비행기를 타면서, 참으로 살기 위해 발버둥 치며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던 나는 실은 이도 저도 아닌 겁쟁이였다. 치졸하기 짝이 없는. 마치 몸뚱이만 컸지, 해달라는 대로 해주지 않으면 바닥에 누워버리는 아들내미와 내가 다를 게 뭐란 말인가. 비행기는 추락하지 않을 확률이 더 크며 나는 머리로는 미국 땅을 밟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아 힘드러 나 좀 죽여봐 죽여줘.

죽을 용기도 없는 애가 죽음을 들먹이며 살고 싶다며 파닥거리는 꼴에 , 인생은 어이가 없었는지 목 끝에 칼을 겨누고 있다가도 죽일 가치가 없다 판단하고,  " 저 놈의 배때지는 내가 언젠가.. 한 번만 더 들이밀기만 해 봐라. 네가 살만 할 때 일을 쳐 주마" 하는 듯했다.


몬나따


스스로 신파극을 써서 눈물을 쥐어 짜야만 연극의 막을 올릴 수 있는 것 마냥 나는 그때 그렇게 참 못났었다.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가장 최소한의 것으로. 갑자기 손 끝이 바닥 바닥 움직이지 않았다.

최소한의 기준을 잡기가 어려웠다. 아이는 당시 4살이었고, 자라기 위해서는 동네 하나가 필요했었다.


비행기 터미널 앞에서. 아이는 엄마보다 빨리 자란다.

-아이가 한국말을 잊으면 안 되니까 책 몇 권

-학교에 제출할 서류, 신분을 나타낼 서류들

-당장 입을 여벌 옷

-노트북 핸드폰

-튜브 고추장 몇 개

-된장 한통

-컵라면 몇 개

-안경

-품위 유지를 위한 진주 귀걸이 한쌍


여기까지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전부였다.

천방지축 아이의 손을 잡고 가야 했기 때문에 큰 가방은 꿈도 꾸지 못했다.


타지에서 아이와 함께 몇 년 공부를 하기 위한 준비물로는 참으로 단출을 넘어 비루하기 짝이 없었다.


후에 우리는 공항에서 피난을 가는 난민처럼 각각 배낭 하나 덜렁 메고 트렁크 하나를 꼴꼴 꼴 끌고 다녔다.



가족들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고해야 했다.


아빠는 내 손을 쥐었다. 핏기 없이 창백한 아빠의 손은 따뜻했다. 언제 볼지 모르는 우리는 눈으로 안녕을 고했다. 엄마와 교대할 시간이 다가왔다. 택시는 병원에 도착했고, 우리는 스치듯 바통 터치하며 서로를 꽉 끌어안았다. 울고 싶지 않았다.


남겨진 엄마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아픈 아빠에게는 아빠의 모든 행운을 내 합격에 끌어다 쓴 것 같은 죄책감에 눈을 마주치기 어려웠다.

 

단, 하루만 사는 나에게 지나치게 걱정을 쏟아주는 타인들이 이상하게도 그 날만큼은 지옥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택시는 기다렸다.


시간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던 나는 엄마가 타고 온 택시를 타고 그대로 공항으로 향했다.

앞으로 펼쳐질 그 어마어마한 일들을 뒤로 한채 아무 생각 없이 아이의 손을 잡았다. 이제 좀 마음껏 잠을 잘 수 있겠구나 하는 안도감 정도가 들었달까. 좁닥한 비행기 안에서 나는 와인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쓰디 쓰다가 종국에는 달디단 와인이 나를 잡아 먹을 때쯤 참으로 무모한 나라는 인간은 서서히 앞날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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