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그 간 내가 쓴 글을 시간을 두고 읽어 보고 있었다. 사실 다시 읽어볼만큼 많은 글도 아니고, 긴 글도 아니지만 일관되게 그간의 나의 글들은 화가 나 있었다. 아마도 지금 그 화를 알아 챌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의 차가움도 손 안에 쥐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다행인지 판단이 서지 않을 때, 한국을 다녀올 기회가 생겼다. 사실 미국에 도착해서 8년동안 한국은 나에게 없는 나라와 마찬가지였다. 가끔 들려오는 미세먼지 소식이나 이웃나라 이야기들이 간간히 들려오긴 했지만, 하루하루가 버거웠던 나에게 그저 한국은 '도망갈 수 없는 도피처'였다.
번번이 한국행 티켓을 살 때마다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갈 수 없는 이유가 생겼었고, 나는 그 이유를 순응했다. 한 다섯 번쯤 위약금을 내고 물렀었나. 이제는 더 이상 못 갈 이유가 없지 않나 싶었을 때가 이미 7년이 지나 있었다. 7월에 태어난 모질이는 7년이라는 해를 훌쩍 넘기고 이듬해 7월에 한국행 비행비표를 끊었다. 가기 직전까지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정말 가긴 가는 걸까라는 마음으로 공항에서조차 마음이 조마조마 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인생이라는 작자는 나의 화를 누르고자 참 많은 노력을 했던 것 같다. 그 주체는 내가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목마른 자였고, 가지지 못한 자였다. 그래서 화가 났고 심사가 뒤틀렸다. 사소한 일에도 감정이 복받혔으며 왜 내 인생만 이 모양인건지,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지 무심한 하늘에 대고 욕지거리를 쏘아 붙이곤 했다. 나는 그래서 인지 정확한 뜻도 모르는 쓰는 '시발'과 철 지난 할머니들이 쓰는 '옘병'이라는 말의 어감을 좋아한다.
가진 자에게 주어지는 특권같은 것이 있다. 그 것은 소위 무심함인데, 이는 아무나 가질 수 있을 것 같아도 모두가 가질 수는 없어서 사람들은 '치레'같은 것을 하기도 하고 로고플레이로 스스로를 치장하기도 한다. 나도 그 중에 하나인지라, 그 무심함을 참 닮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 어설픔을 스스로 벗어버리고 싶어 아둥바둥할 때에도 한국은 나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대한민국 사람이지만, 한국이 밀어내는 사람이었다. 미국 영주권을 받아도 미국을 모르겠고, 대기업에 입사해서도 언제나 겉도는 듯한 느낌을 안고 있었다. 4살 때 이고 지고 데려온 아이가 11살이 되어 더 이상 손이 많이 가지 않고, 고 딱 뜨듯 미지근한 그 때야 나는 스스로에게 난 화는 사실 내 마음대로 '소유'하지 못했음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달았다. 스스로 고귀한 척했지 남들이 가지고 있는 건 다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마트 바닥에 드러누워 깽판치는 4살짜리 아이였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여전히 미니멀리스트와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이를 깨닫기까지 7년이 걸렸고, 화가 풀릴만큼의 최소한의 것을 손아귀에 쥐고 나는 한국을 향했다.
그리도 오래도록 가지 못했던 한국은 참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버스 전광판이 새로 생겼고, 홍대에는 범람하는 젊은이들의 아우성으로 지하철역조차 접근하기 힘들었다. 예전에 알던 카카오택시는 이젠 내가 콜하기 어려울 만큼 인증번호를 요구했으며, 그저 평범하기만 했던 친정은 어느새 미국 집에 익숙해져 버린 나에게 작디 작은 새둥지였다. 떠나기 이전에 느꼈던 향수 비슷한 느낌을 다시 담기에는 예전의 모습이 많이 사라져 버린 나의 나라에서 나는 잠시 당황했던 것 같다. 2주라는 짧은 시간밖에 낼 수 없었던 휴가는 사실 매우 충분한 시간이었던 셈이었다. 나의 흠칫거림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 그렇다고 한국이 고향같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잠시 정체성에 혼란을 느낀 나는 깨달았다. 미국도 한국도 담아내지 못하는 나는 그저 표류하는 인간이었음을 말이다. 스스로가 회색인간임을 깨닫고서야 내가 그간 알고 있었던 '개성'이라는 건 개나 줘야했다는 사실 또한 알아버렸다.
수 많은 유행 중에 내가 순순히 따라 한 적은 없었다. 어렸을 때는 그저 남과 다른 정체성을 순순히 따라하지 않음으로 대신하게 되었고, 나이가 들면 들 수록 대중에게 인기가 있는 것들은 더 이상 나와 어울리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를 개성이라 칭한다면 그도 그럴 것이지만 사실 무엇을 좋아하는 지 몰랐던 나였다. 그리고 그 모습이 회색이라는 중간에 귀속되어 버렸다. 사실을 알고나니 참으로 기똥차게 시원했다. 종합하자면, 나라는 사람은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둥둥떠다니며 가지지 못함에 분노하는 개똥망나니였던 셈이다.
웃음이 나왔다. 아니 어쩜 딱 들어맞게 나인지 막 신이 나고 어쩐지 스스로에 대한 분노가 삭혀졌다.
이렇게 이도 저도 아닌 나는 사실 나의 불행 역시도 이도 저도 아니었음을 알았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마음 먹는 대로 되지 않으면 화가 나는 것이 인간이라 나 또한 인생이 참 우라지게도 안 풀렸다 생각했다. 그게 무엇이든 단 먼지같이 작은 것 하나도 거저 쥐어지는 것 없이 꼭 수십배는 힘을 쏟아야 겨우 하나 가져갈 수 있으니 '잘'하는 것보다 '성실'에 가까운 나는 잘 참는 편이었다. 그래서 참는 내가 한편으로는 참으로 한심하다 생각했다. 그런데 견디던 중에 마주한 나의 뿌리는 생각보다 견고했었다. 삶이 죽을만큼 남의 편만 드는 것도 아니었고, 굳이 내 편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악의적이지도 않았다. 누군가는 노오력을 해서 판도를 바꿀 수 있다고 했지만 그도 내가 아니었다.
살면서 누구나 애를 쓰고 본인의 기준에서 최선이라는 것을 하고는 산다.
그래서 희망이라는 것을 눈 앞에 두고 닿지 않으면 좌절하곤 하는데, 스스로를 그 안에 두고 싶지 않다 생각했다. 그저 나는 개똥망나니처럼 그렇게 살았다 치고 부유하는 인간으로 하루하루를 견디고 살아보는 것도 꽤 나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다 도착하는 어딘가가 더 지금 보다 나은 곳이면 이 또한 얻어 걸리는 인생 아닌가도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