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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소 감상문

모순의 조화를 통해 보여지는 것들이 경이롭다

by 조한서

이 영화가 모티브로 하는 십우도에 대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전혀 몰랐다. 그렇기에 십우도와 불교 교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의 입장으로 영화에 대한 해석을 해보았다. 십우도에 대해 조사한 뒤엔 영화를 다시 다른 방향으로 바라보고 싶다.

영화는 불이 나면서 시작된다. 이는 자연과 문명을 분열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점과 이 장면 뒤에 나오는 자막을 통해 초반의 불은 자연의 분노를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를 마지막까지 보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영화 초반의 불은 후반 장면의 눈과 대비되는 것처럼 보인다. 평소에 우리에게 비춰지는 불은 모든 걸 없애는 존재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조금 다르다. 눈은 모든 걸 덮는다. 빛도 마찬가지다. 눈과 같이 후반에 빛이 비치는 장면도 나오는데 빛 또한 모든 걸 덮는다는 걸 영화는 나타낸다.

이처럼 우리가 기존에 가진 시점으론 눈과 빛들은 치유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영화에선 그렇지 않다. 소가 죽기 전과 남자가 죽기 전 모두 빛이 그들을 비추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또한 남자가 죽었을 때 길게 하얀 배경이 비춰지는데 이 역시 이러한 점들을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즉, 자연은 의도가 없이 우리에게 죽음을 줄 수 있다는 걸 나타냈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렇게만 바라볼 순 없는 게 자연을 상징하는 소는 분명히 남자에게 많은 이점을 주었다.

소가 등장하기 전까지 영화에서 말하는 소가 그저 상징적인 존재인 줄 알았다. 어쩌면 남자가 소를, 그리고 자연을 의미하는 건 줄 알았다. 남자가 불이 나고 남은 산속에서 물속에 뛰어듦으로써 불에 대한 회피이자 안티테제, 즉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남자가 문명화에서 도태된 이를 나타낸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문명화에서 도태된 이가 자연에 살게 되었으니 어쩌면 자연과 문명에서의 도태를 비슷한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초반에 등장한 할머니는 남자의 행동에 대해 화를 낸다. 그리고 남자를 여러 곳에 이용한다. 이는 문명화 속에서 이용되는 자연처럼 보이기도, 문명화에서 도태됨으로 나타나는 그저 그런 노예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대에서도 문명에 부적응하는 자가 받는 피해들을 생각해보면 이는 더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예외인 부분은 남자가 다른 이들이 진행하는 의식을 따라한다는 점이었다. 이 부분을 통해 남자를 자연만 상징하는 것은 아니라는 관점으로 바라보게 만들었고 내 생각에 확신을 들게 만들었다. 이후로도 남자는 점점 인간의 삶에 다가간다.

그저 남자에 대한 상징적 표현인 줄 알았던 소가 처음 등장했을 때 남자는 소를 이리저리 쫓아다닌다. 결국 소를 잡긴하지만 곧 도망가버리고 만다. 소는 스스로 우리로 돌아오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남자는 기쁨, 절망, 걱정, 안도 등을 느낀다. 이러한 느낌들은 모두 소를 통해 나타났다. 소도 스스로 집으로 돌아온 걸로 보아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남자는 거기에서 걱정과 안도 등을 느낌으로서 자연에 가까워진다. 그러한 초반이 지나고 나니 소가 자연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남자는 점점 인간들의 사회에 적응한다. 문화(의식)를 함께하고 새로운 사실들을 발견하고 새로운 감정들을 느낀다. 소를 사용하는 방법을 다른 사람에게 배우고 남자도 소를 이용하게 된다. 남자도 문명화돼 가는 것이다. 하지만 소로부터 공존도 배우게 된다. 남자는 소와 함께 하는 걸 즐긴다.

이 시점부터 영화 내에 비가 지속적으로, 그것도 엄청나게 많이 내린다. 이 비들이 내리는 장면이 지나고 날 때마다 남자는 점점 변화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남자는 문명화된 것처럼 보이기도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면서 소와 남자는 비슷한 존재이자 순환되는 존재가 된다. 소와 남자가 공생하게 된다.

영화의 중반쯤 와서 소와 남자는 점점 더 비슷해져 간다. 소가 다른 사람에게 빌려져지고 난 뒤, 소는 온몸에 상처가 가득하고 매우 지쳐 보인다. 남자 또한 남자에게 소가 없을 때 다른 사람에게 이전의 노예처럼 대해지는 것을 보아 둘은 지쳐가고 있다. 남자는 심지어 소 대신 손으로 밭을 갈기도 한다. 그런 소에게 남자는 위로하는 듯한 표정과 행동을 취한다. 남자도 소를 보며 웃는다.

이런 점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되며 동질성이 강해진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있다는 점도 둘의 공통된 특징이 된다. 소가 남자에게 다시 돌아온 후 둘은 전보다 더 사이좋게 지낸다. 이는 소와 남자가 서로에게 동화되며 비슷한 존재로 나아간다는 걸 뜻한다.

영화의 중후반, 남자는 이제 문명화에 거의 적응된 모습을 하고 있다. 옷도 이전보다 훨씬 멀끔하게 입고, 소를 빌려주는 것도 익숙해진 듯 보인다. 소를 빌려줌으로써, 소를 이용함으로써 문명화에 적응된다.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 같이 술을 마실 거냐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특히 소가 죽기 전이자 마지막으로 빌려지기 전, 소와 남자가 밭을 가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도 비가 엄청나게 많이 오는 걸 보면 또다시 변화되는 걸 상징하는 것 같다. 하지만 소는 남자를 잘 따르지 않는다. 밭을 가는데 남자가 가라는 데로 가지 않고 이리저리 혼란스럽게 돌아다닌다거나 남자가 채찍으로 툭툭 쳐야 말을 듣는다. 이 장면은 맨 처음 할머니가 남자를 대하던 것과 겹쳐 보인다. 이는 자연과의 갈등이 심화되는 것을 드러낸다.

그 이후 소를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서 일을 시키는데 이때는 소가 평화로워 보인다. 같이 일을 하고 같이 누워 잠을 자고 같이 집에 온다. 비가 올 때의 소의 반항은 소가 죽음을 받아들이기 전 마지막 발악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이때 앞서 말한 빛이 사용된다. 소가 죽기 바로 전 장면에서 소와 남자가 같이 집으로 걸어올 때 빛이 쨍하게 그들을 비춘다. 화면 속 카메라에도 빛이 진하게 비춰져 잔상처럼 나타난다.

결국 소는 다른 이에게 빌려진 뒤 죽는다. 소를 마지막으로 빌리기 전 모습이 영화 내에서 남자가 가장 멀끔한 옷을 입고 있는 부분이라는 점도 매우 흥미롭다. 문명화에 거의 다 다다랐을 때 남자가 무너지는 점은 불교의 십우도를 모티브로 한 영화임에도 바벨탑이 떠오르는 게 재밌었다.

이후 남자가 소를 빌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러 남자들이 소를 데리고 올라가는 걸 본다. 소를 빌려주는 상인이 소가 부족하다고 여러 번 얘기했던 걸로 미루어본다면 이는 문명화 자체 또한 퍼져나가고 나아가는 길이 넓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소의 죽음은 남자가 자연으로부터 외면받는 것처럼 느껴진다. 소를 점점 더 이용하고 문명화되어갈때 소가 죽었기 때문이다.

소가 죽고 난 다음 남자는 소의 우리에 들어가 눈을 감고 명상을 한다. 가만히 앉아있는 남자를 비추면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엄청나게 큰데, 이와 동시에 흐르는 음들은 살짝 무섭고 두려운 느낌 또한 준다. 즉, 큰 소리와 음이 효과적으로 어우러져 그 느낌을 극대화시켜준다.

이와 함께 장면전환엔 아주 느린 클로즈업과 디졸브가 이용된다. 이는 명상의 고요함과 시간의 경과를 효과적으로 나타낸다. 특히 정말 느리게 디졸브 되는 게 새롭게 나아가는 과정을 나타내준다고도 생각되어 좋았다. 또한 아주 느리게 나타나는 클로즈업과 디졸브는 점점 커지는 음악과 대비되어 더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이때도 빛이 조금씩 비쳐온다는 점은 소와 같이 불길한 미래를 상징하게 만든다. 결국 디졸브가 끝나고 다음 씬으로 넘어갈 때 영화는 그저 하얀 배경의 화면을 찍는다. 이는 눈과 빛이라는 또 다른 자연 속 일어나는 다음 일들에 대한 예고와 상징들을 의미하게 된다.

남자가 다시 눈을 떴을 때의 창문사이로 들어오는 엄청난 빛들은 이를 다시 한번 느끼게 해 준다. 그러한 빛들을 모두 받아내면서 바깥을 향해 창을 열어낸다. 이후 남자가 떡을 두드리며 떡을 만들어내는 장면은 소가 죽기 전 소가 편안해 보였던 모습처럼 굉장히 편안해 보인다. 떡을 두드리며 찹쌀떡을 만들어내는 남자는 덤덤하면서도 불편한 기색이 전혀 없다.

이는 문명화와 자연이 서로가 없을 때 비로소 편안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훌륭하게 나타낸다. 소와 남자의 죽음 전 평화로움을 길게 비추면서 이를 상징이나 대비로 나타내었다는 점이 매우 좋았다. 이 장면들은 영화가 나아가는 길 속에서 마음을 정리시키는 역할 또한 해낸다.

하지만 그 후 남자는 흰 찹쌀떡을 먹다가 목에 걸려 죽는다. 남자가 명상 후 죽기까지 모든 건 흰, 즉 빛이 비춰진다. 심지어 죽고 난 이후엔 하얀 배경만이 또다시 덮인다. 이 또한 성경의 관점으로도 바라볼 수 있는데 성경에서 태초의 시작은 빛이기 때문이다. 이를 자연과 연관시켜 보면 빛에서 시작하고 빛에서 끝나는 지극히 자연적인 특징을 지닌 삶에 대한 고찰을 던진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나고 카메라는 한 섬에서의 소로 장면을 전환시킨다. 이를 보면 자연스럽게 이전에 죽은 소가 떠오른다. 남자가 죽고 난 뒤에 세상처럼 보이는 이 섬은 소로서 의미되는 자연은 죽음과 동시에 살아있다는 걸 보여준다.

이 의미는 이후 스크린 속 미장센에서 더욱 확고히 드러난다. 풀을 뜯어먹는 소와 그 뒤에 불타오르고 폭발하고 파괴되는 또 다른 섬을 비추며 평화로운 앞과 불안한 뒤를 대조시키는 것이 그에 해당한다. 남자가 죽고 하얀 배경이 모든 걸 덮으며 이젠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새로운 죽음과 생존을 대비한 것이 재밌으면서 인상 깊었다.

소의 뼈가 사라져 보이는 장면도 기억이 난다. 이 장면에서 엄청나게 큰 소리가 다시 들려오는데 이는 영화의 마지막 변환점이 된다. 소는 죽으면 가죽이 먼저 썩는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소에게 뼈는 전혀 없어 보인다. 자연의 순리를 거스른 소는 이 모든 게 어쩌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 이후 소는 자연을 누비고 영화는 끝이 난다. 아, 엔딩크레딧까지 모두 끝난 뒤 이 영화 속 세상에서 현실, 즉 영화 밖으로 나아가는 마지막 그림으로 끝난다.

전체적으로 이 영화는 생각할 거리를 매우 많이 던져주었다. 하나하나 끊어지면서도 연결되는 이야기, 이야기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보여지는 것들이 신기하면서도 경이롭게까지 느껴졌다. 영화에 대사가 거의 없는 데 이 점이 남자와 소에 대한 모습을 온전히 느낄 수 있게 하여 오히려 장점이 되었다. 짧지만 방대한 이 이야기는 자연이라는 큰 주체를 효과적으로 이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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