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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갑낫을 Feb 03. 2021

한 달에 한번

시는 시다.

결혼 전부터 시어머니가 늘 하시던 말씀이 있다. "한 달에 한 번만 보면 된다. 그게 기본 도리다. 다른 건 다 필요 없다. 기본만 하고 살자." 결혼 후, 우리는 시어머니가 제정하신 "한 달에 한번" 법칙을 지키려고 부단히 애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나는 날마다 시어머니는 "한 달에 한번"을 강조하셨다.


그런데 이 말을 자꾸 듣다 보니 시댁에 가는 일이 숙제처럼 느껴졌다. 한 달에 한번 법칙을 못 지키는 달에는 죄책감이 들고, 누군가에게 혼날 것 같은 괴로움에 시달렸다. 어쩌다 보면 한 달에 두세 번 만나는 날도 있었는데, 그때는 마치 초과근무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너네 지난달에 안 왔어."


내 귀를 의심한 순간이었다. 만남 횟수 같은걸 세고 계신 건가? 당황한 남편은 왔었다고 했지만 시어머니는 완강하게 지난달에 온 적이 없다고 주장하셨다. 벌점을 받은 느낌이었다. 앞으로 나도 시댁 방문 일지 같은걸 작성해 두어야 하는 건가? 사위에게도 똑같이 이런 말을 하실까?


여기서 또다시 원점이다. 안부전화처럼 '한 달에 한번'은 시어머니의 일방적인 '요구'다. 본인이 원하는 기준을 정해놓고, 기본 도리라는 프레임을 씌워서 시집살이를 시키고 계신 거다. 시누이 부부(사위)에겐 이런 말을 하시는 걸 들어 본 적도 없다.


그날 시댁에 다녀와서 내가 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냐며 기리기리 날뛰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남편과 한판을 붙고도 해결되지 않는 답답한 마음을 부여잡고 여기저기 상담센터를 알아보다가 부부상담 유튜브 채널을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 이런 명쾌한 상담내용이 나온다.


효도에 스트레스를 준다거나 당연히 부모님한테 이렇게 하는 거지, 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부터가 문제가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효도를 강요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부터가 문제가 되는 거죠.

차라리 그러실 거면 부탁을 하는 게 훨씬 건강해요. 자식들이 오더라도 보람이 있어요. 시간을 내는 그 마음을 보람 있게 해 주면 그나마 괜찮아요.

그런데 마치 그게 당연하고, 안 하면 너는 괘씸한 며느리고, 내가 며느리를 잘못 봤고, 며느리 탓을 하게 된다면 그건 정말 어르신 부끄러우신 줄 아셔야 되는 거예요.

- 이주은 부부상담 채널


내가 며느리에게 부탁을 해야 한다고? 이 영상을 보여드리면 노발대발하실 분들의 모습이 아련하게 스쳐간다. 거기에 합세해서 “그건 며느리가 당연히/ 원래/ 응당/ 결혼했으면 해야 하는 일이지”라고 엄마 편드는 내로남불 시누이들의 모습까지 겹쳐 보인다.


저마다 사정은 다르겠지만 이처럼 시댁에서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시집살이가 여전히 실로 존재한다. 안부전화나 설거지 같은 일상적인 것들부터 며느리의 커리어까지 관여하는 시월드의 갑질 스토리는 설날부터 추석까지 밤새 할 수 있을 것이다.


청개구리 같은 성질의 나는 한 달에 한 번을 안 지켰다고 돌을 맞은 순간부터 그 법칙을 지킬 이유를 잃었다. 경고를 받을 일이 아니지 않은가? 이런 기가 차는 상황을 몇 번 겪고 나자 나는 나 자신을 지키는 일이 한 달에 한번 법칙보다 훨씬 우선임을 통감했다.


어머니가 주시는 스트레스를 제가 어디에다 풀었겠어요? 어머니가 저한테 탁구공만 한 스트레스를 주시면 전 규태한테 배구공을 날려버렸어요.

어머니한테 받은 스트레스 고스란히 아들한테 풀었겠죠. 그건 어머님도 다 해보셔서 잘 아시잖아요. 그게 얼마나 자명한 이치인지.

어머니는 저를 찌르고, 저는 규태를 찌르고, 규태는 제 눈치를 보고, 그럼 어머니는 또 저를 찌르고 그 멍청한 사이클에서 우린 다 그냥 피해자였던 거겠죠.

- 동백꽃필무렵, 홍자영


어머니도 언젠가 아실까? 자명한 이치를. 나는 스케일이 너무 커서 어머니가 공기알만 한 스트레스를 주시면 어머니가 그토록 사랑하는 아드님께 볼링공을 날려버렸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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