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시다.
요즘 시어머니들은 보고, 듣는 게 많아서 오히려 며느리 눈치를 본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듣는다. 제사도 없고, 명절에 전도 안 부치고, 만나면 외식하는데 넌 시집살이 안 해서 좋겠다거나, 너네 일상에 참견도 안 하니 이런 천사 시어머니가 어디에 있느냐고 혼자서 뿌듯해하시는 시어머니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왜 모르실까? 저런 말들이 다 시집살이인 것을. 애초에 내가 격노하는 포인트는 시댁에 가서 전을 부치고, 설거지를 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당연히 며느리니까 해야 하는 것들을 시어머니인 내가 특별히 면죄해준다는 듯한 뉘앙스. 있지도 않았던 죄를 사해준다는 듯이 하는 말들에 깔려있는 저의가 나를 돌게 만든다.
결혼 초부터 3년 차에 접어들 때까지는 나도 예쁨 받는 며느리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뵙고, 만나서는 반복되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시누이와 남편이 집중해서 듣지 않으니) 혼자서 방청객처럼 들어드리고, 처음 듣는 마냥 리액션하고, 전화로 한 시간 넘게 본인 이야기만 하셔도 다 들어드렸다.
시누이가 엄마 말 제일 잘 들어주는 사람이 며느리라며 매번 내게 전담 마크를 시켜도 웃으며 자리를 지켰고, 시어머니가 더 가까워지자고 하실 때마다 밝은 목소리로 "네네, 어머님"이라며 화답했다. 왜 먼저 전화 한 번안 하냐고 물으실 때에는 "어머님, 노력할게요." 라며 없는 영혼을 쥐어짜서 원하는 대답을 해드리기도 했다.
시댁에서 원하는 내 캐릭터는 분명했지만 그 캐릭터를 소화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는 나로서는 점점 모든 게 불편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며느라기 시절 네네병에 걸려서 네네거리던 나의 행동에도 일부 책임이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그중에 아닌 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조금씩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드리고 싶었다.
시댁만 다녀오면 남편에게 지랄 발광을 하는 것도 멈추고 싶었고, 시댁 이야기만 나오면 날을 세우며 싸우는 현실이 삶의 질을 심각하게 떨어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웃픈건, 괴로움에 지쳐 참고 참던 내가 솔직하게 나를 드러내고, 직접적으로 불편함을 표현하고부터 고부갈등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는 거다.
"어머니, 길게 통화하시는 거 매번 들어드리기 너무 힘들어요."라고 말씀드린 이후부터 시어머니는 그야말로 폭발하셨다. "우린 특별한 고부간이 되자, 나 노력할 거야."를 외치시던 분이 앞으로 너네 안 본다부터 시작해서 며느리 도리 한 게 뭐가 있냐 등등 온갖 역정을 내기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그래 뭐 저런 도리가 예전에 존재했다고 치자, 그런데 지금은? 무슨 죄를 진 것도 아닌데 결혼했다는 이유로 시댁을 어려워해야 하고, 설설 기며 행동해야 친정 부모님 욕을 먹이지 않으며, 그게 며느리 도리라는 막걸리 같은 말이 또 어디에 있을까. 남편도 점점 그놈의 '도리'라는 말에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시댁에서 원하는 며느리 도리는 저마다 다르다. 며느리 도리에 대한 기준을 정하고, 평가하는 것은 대부분 시어머니가 주관한다. 매우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포인트기 때문에 애초에 입맛에 딱 맞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하다. 마음에 안 들면 바로 "며느리 도리"라는 카드를 내세울 준비가 된 분들이기 때문이다.
이제사 깨달은 거지만 며느리 도리라는 말에 굳-이 감정 소모를 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선배들이 안 해도 욕먹고, 해도 욕먹고, 하면 할수록 더 원하는 게 시월드라 뭘 하려고 하지 말라 했던 건가? 무튼 나 역시도 수많은 상담과 공부를 통해 얻은 결론은 이 문제에 대해 남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거다.
시부모님이 며느리 도리를 운운하실 때, 조목조목 반박해줄 남편이 있는 한 한듣한흘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위 도리라는 말은 태어나 지금까지 들어본 적도 없는데, 왜 며느리 도리라는 말이 아직도 내 귀에 들리는지 의문이다. 내가 실천 가능한 며느리 도리란 남편과 행복하게 사는 것, 그것뿐임을 잊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