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갑낫을 Feb 05. 2021

왜 안자고 가니?

시는 시다.

결혼하고 첫 명절 때의 일이다. 결혼 전 우리 집은 명절 전날 친할머니 댁에 가서 제사 음식을 준비하고, 다음날 아침 다시 친가에 가서 제사를 지내고, 오후에는 외갓집에 갔었다. 양가 모두 서울이라 명절이라고 친가나 외가에서 잠을 자는 일은 없었다.


시댁은 제사를 지내지 않기 때문에 아침에 집에서 가족들과 예배를 드리고, 외가 식구들과 모여 저녁을 먹는 게 명절을 보내는 방식이라고 했다. 양쪽 집 모두 명절 저녁을 외가 식구들과 보내온 셈이라, 몇 주 전부터 우리는 첫 명절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토론했다.


내 입장에서는 명절 당일 아침 엄빠가 할머니 댁에 제사를 지내러 가기 때문에 저녁에 가기를 원했고, 오빠도 원래 명절 저녁에 외가 식구들과 모여서 지냈기 때문에 그 관습을 견지하고 싶어 했다. 격조 있는 대토론으로 시작했지만 우리의 대화는 점점 사랑과 전쟁으로 변질되어갔다.


당시 월요일이 추석 당일이었기 때문에 남편과 나의 합의점은 그냥 우리가 연휴 반납하고 희생하자!라는 거였다. 대체 명절이 뭐라고 그렇게 숭고한 단어를 갖다붙여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서로 지칠 대로 지쳐서 그래 첫 명절이니까. 하고 합의했던 거로 기억한다.


첫 추석 명절 일정
토요일 : 시댁 외가 식구들과 저녁 모임
일요일 : 친정 할머니댁 방문
월요일 : 오전에 시댁, 오후에 친정


그리하야 각자 부모님께 우리가 합의한 내용을 잘 말씀드리기로 했고, 나는 당연히 남편만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남편 말로는 그동안 본인 집에서는 명절 음식 준비도 안 했었고, 매번 외식을 했기 때문에 편하게 가서 즐기고 오면 된다고 하니 진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시댁 외가 식구들이 모여 식사를 하는 토요일 저녁, 사건이 발발했다. 당시 식사 장소가 친척 분이 운영하시는 식당이었는데 (일요일에 휴무이니) 다음날 어머님 댁에 다시 모여서 저녁을 먹자는 이야기가 오고 간 거다. 이때부터 기분이 참 이상했다.


일요일? 우리는 일요일에 친할머니댁 방문 일정이 있다고 말해두었을 텐데?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너네는 상황보고 되는대로 하면 된다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니... 내일 또 만난다고? 명절 당일까지 3일 연속으로? 그럼 오늘 왜 미리 만난 거지?


표정관리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평소보다 빠르게 술을 마시던 시누이가 갑자기 반쯤 풀린 눈으로 나를 향해 주사를 부리기 시작했다. 너 짜증 난다. 진짜 싫다. (이하 생략) 그렇게 몇 분간 시누이의 주사가 계속됐고, 온 가족은 얼어붙었다. (남편은 거의 뭐 넋이라도 있고 없고...)  


아니, 이 날 대체 나한테 갑자기 왜 그런 건지 이유라도 알고 싶었는데 나중에 알게 된 대략적인 이유는 이랬다.

첫 명절이면 며느리가 전날부터 시댁에 와서 같이 먹을 요리를 하면서 시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렸으면 좋겠고, 오랜만에 하룻밤 자면서 명절 분위기도 내고, 엄마도 아들하고 같이 시간을 보내는 걸 기대하셨을 텐데

대뜸 명절 전날 아내의 친할머니 댁에 간다는 말을 남편이 시어머니께 '통보' 했고, 그로 인해 엄마가 서운해하시는걸 곁에서 보고 있자니 본인 마음에 감정이 쌓였으며 그게 터진 거 같다고... (그게 왜 나한테 터지시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 후부터다. 그날 모임이 마무리되고 집에 가는 길에 남편에게 대체 왜 아무 말도 못 한 거냐고, 나를 데리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거나 지금 뭐 하는 거냐고 한마디면 됐다고, 나를 보호해줄 수 없다는 걸 느꼈으니 내일은 물론이고 명절에도 못 가겠다고 했더니


“오늘 진짜 너한테 너무 미안한 상황이고, 이런 상황이 올 줄 꿈에도 몰랐고, 누나가 백번 잘못한 게 맞는데, 첫 명절이니 낮에 친할머니 댁 들리고 저녁엔 시댁 모임에 다시 가보는 게 우리가 욕을 안 먹는 일 같아....”라는 대답이 돌아온 것.


욕? 욕을 지금 누가 먹어야 되는 건지 모르는 건가? 아내가 방금 겪은 일은 아랑곳없이 이틀 연속 만나는 식사 자리에 불참한다고 욕을 먹는다고? 대체 무슨 욕을 어디서 먹는다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당시 뭣이 중헌 지를 전-혀 몰랐던 것 같다.


그렇게 새벽까지 잠을 못 이룬 다음날 남편은 일어나자마자 내 눈치를 봤다. 나는 전날 일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보상을 받고 싶었다. 일단 할머니 댁에 가야 하니 가서 우리 엄마의 제사 음식 준비를 도울 것을 남편에게 요구했다. 겨우 생각해낸 방식이 참 치사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할머니 댁에 도착하자마자 전은 오늘 남편이 다 부치고 갈 거라고 선언했더니 할머니, 고모들, 엄마까지 나서서 백년손님인 사위에게 시킬 수 없다고 난리를 부리는데 정말 기가 찼다. 나는 남편이 나에게 했던 그대로 아랑곳없이 앞치마를 건넸다.


사람이 그냥 무심한 건지, 내게 미안한 마음이 커서인지, 전 퀄리티를 보고 저녁에 시댁에 가든 말든 결정하겠다고 해서인지, 태어나 한 번도 해본 적 없다는 전을 미친 듯이 부치며 나름대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마음이 누그러든 건 사실이었다.


"그래, 오늘 가면 나한테 사과라도 한마디 하시겠지?" 하는 마음으로 저녁을 먹으러 시댁으로 향했다. 너무 큰 바람이었을까? 뒤집히는 속을 부여잡고 시댁에 도착했는데 시어머니도, 시누이도 전날 일어났던 일에 대해 단 한마디의 사과나 설명이 없었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는 그 멘탈로 2차도 가자길래 거기까지도 따라갔다. (이 날의 나란 늬연을 반성한다.) 그렇게 자리가 마무리될 무렵, 남편이 이제 우리는 집에 가겠다고 이야기하는데 시어머니가 하시는 말씀...


“내일 어차피 아침에 또 와야 하는데, 왜 안 자고 가니?”


네?!? 마음의 소리가 크게 나올 뻔했지만 내가 당시에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못 들은 척뿐이었다. 우리가 단호하게 돌아서자 시어머니는 내일 아침 10시까지 오라고 못을 박으셨다. 게다가 다음날 아침 시댁에 도착하자마자 우릴 맞이한 건 반가운 인사가 아니었다.


"5분만 더 늦었으면 혼내려고 했는데..."


이런 말들을 한듣한흘 못하는 나를 보며 남편은 안쓰럽다고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이해할 수 없다. 진정 어머니도 그날 있었던 일을 기억 못 하시는 걸까? 정말 그래서, 평소와 전혀 다른 며느리는 안중에도 없이 왜 자고 가지 않느냐는 말을 꺼내실 수 있었던 걸까? 아직도 의문이 든다.


사실 결혼하고 초반에 몇 번은 맛난 저녁 시간을 보내고 얼큰하게 취하면 시댁에서 잠을 자고, 해장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오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안 자고 가는 애들"이 되었다. 내가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시댁에서 자지 않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요즘도 종종 시어머니는 “너넨 어차피 안 자고 갈 거지?”라고 물으신다. 그리고 어쩔 땐 너넨 왜 한 번을 안 자고 가는 거냐고 역정을 내시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못 들은 척으로 일관하고, 남편은 이 눈치 저 눈치 살피며 대응하기 바쁘다.


자식들과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으신 부모님의 마음은 알겠다. 친정에서도 종종 자고 가라는 말을 들으니까. 다만, 누구라도 서열 하위가 되면 그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을 거다. 내 집에서 여왕처럼 있을 수 있는데 왜 굳이 시댁에서 자려하겠나?


시댁에서 내가 백년손님까지는 아니어도 존중받아 마땅한 존재로 리포지셔닝이 되었을 때, 남편이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보호해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을 때, 그런 날이 온다면 혹시 모르겠다. 오늘 자고 갈래요!라는 말이 내 입에서 나오게 될지.  



이전 03화 한 달에 한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