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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사 Feb 28. 2022

하루 종일 집에만 있어도 여기는 제주니까

'제주여자가 서울여자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 - 주말

언니는 기억하는지 모르겠어요.  제주에 처음 이사 왔을  4 근무를 했었어요. 그때는 몰랐는데  무렵  삶의 테마는 아마 '휴양'이었던가 봐요.  돈을 받으면서도  4일만 일하는 삶을 기꺼이 선택했었다니. 지금이라면 절대 그런 결정은 하지 못할 거야!


암튼 오랫동안 살아보고 싶어 했던 제주에 왔고, 딱히 아는 사람이 없으니 약속도 없었고, 내 고양이 가족인 냉이랑 봄동이도 없었으니까, 그땐 나 진짜 쉬는 날마다 부지런히 놀러 나갔었어요. 하물며 처음 이사 왔을 때는 차도 없었는데 혼자 버스 타고 바다도 가고, 오름도 가고, 숲길도 가고, 계곡도 가고, 꽃 보러 다니고, 예쁜 카페도 찾아다니고. 와, 정말 관광객 인양 열심히 쏘다녔었는데. 시간 지나면서 차도 생겼고, 이제는 같이 놀러 다닐 사람도 생겼는데 그때처럼 열심히 놀러 다니진 못하고 있네요. 그때의 그 열정은 제주 이주라는 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겠다는 절박함, 혼자라는 외로움을 인정하기 싫은 몸부림이었던 것 같기도 해요.




암튼 그때 내 주말은 온통 제주로 꽉 차 있었는데 제주살이 10년 차가 된 지금은... 음, 육지에 살 때랑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네. 요즘 내 주말은 보통 그래요. 토요일은 특별한 약속이 없다면 온종일 집에 있어요. 요즘처럼 추울 땐 코타츠 앞에 일단 앉아요. 그럼 냉이는 보통 내 왼쪽 허벅지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고, 봄동이는 무릎 위에 올라와있어요. 그럼 나는 내 고양이들을 쓰다듬으면서 내가 움직이면 냉이, 봄동이의 휴식을 방해하게 될 거라는 걸 핑계 삼아 움직이지 않지요. 티브이를 보거나, 휴대폰을 봐요. 예전엔 제법 책도 읽었던 것 같은데, 이번 겨울이 시작될 무렵쯤 침대 머리맡에 두었던 책들을 '어차피 안 읽어'라면서 다 치워버렸네요... 음.


일요일은 주로 서귀포를 가요. 친구와 같이 주일 미사를 보고,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날이 좋으면 함께 산책도 하고. 아주 특별한 무엇을 하지는 않아요.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는 동백꽃 군락지를 가야겠다는 생각도 이제는 잘 들지 않고, 사람들이 줄 서서 먹는다는 식당, 이를 테면 '연돈' 같은 곳을 가봐야겠다는 마음도 생기지 않아요.


사실 몇 해 동안은 (어쩌면 지금도 조금은 그럴지 모르지만) 그렇게 주말을 보내고 있으면 시간이 갈수록 슬슬 마음이 괴로워졌었어요. 내 금 같은 휴일이 사라지고 있다는 허무함과 함께, 남들은 그토록 놀러 오고 싶어 하는 제주에 살면서도 주말에 아무것도 안했다는 자괴감이 들었다고 할까. 제주에 처음 왔을 때 알차게 쏘다녔던 기억 때문인가, 나는 아마 '집에서 그냥 쉬는 주말'에 좀 심하게 말하면 죄책감까지 느꼈던 것 같아요. 무려 제주로 이사까지 온 주제에 아무것도 안했다니!!! 뭐 이런 거?



하지만 말이죠. 집에서 차 타고 한 10분만 나가면 눈부신 바다가 있어요. 이번 주말에 찾아간 용두암도 한 15분 정도만 가면 있지요. 용두암은 거의 30년 만에 가봤네요. 와. 지금도 여전히 사람이 많아서 좀 놀랐어요. 열두 살 때 가족 여행 왔을 때 용두암 배경으로 사진 찍었던 기억이 제법 선명한데, 제주에 온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동안 여길 다시 와볼 생각을 한 번도 안했네. 새삼 감회가 새롭기도 하더라고요. 내 어릴 적 기억 속에 생생한 그 유명한 관광지가 집과 이렇게 가까운 데 있는 것도. 그런데도 여태 와보지 않았다는 것도. 내가 사는 곳이 제주도고, 내가 제주 사는 사람이라는 게 제법 실감이 났달까.



저녁엔 제주에 놀러 온 친척들을 만나러 무려 성산에 갔어요. 경기도에 살 땐 1시간 거리 정도는 가깝다 생각하면서 다녔는데, 이제는 1시간 거리의 동네 앞에 '무려'라는 수식어가 붙네요. 성산엔 이제 1년에 한 번 정도 겨우 오는 것 같아요. 빛의 벙커에 가서 북적이는 관광들 사이에 자리 잡고 앉아서 모네, 르누아르 미디어 아트를 보고 있자니, '오늘 나 관광객 같네.'라는 생각이 영락없이 들더라고요. 근데 말이에요. 모네 그림 보면서 그 눈부시도록 웅장한 초록빛에 감동하고 있는데 새언니가 "고모, 저 그림들 꼭 제주도 같지 않아요?"라고 하더라고요. 아. 나, 알고보면 저런 풍경 같은 곳에 살고 있구나. 


일요일엔 다름없이 미사 보러 서귀포를 갔었고, 점심 먹은 후에 '날씨도 좋은데 조금 걸을까?' 해서 식당 근처 사계 해변에 갔었어요. 신발 벗어두고 해변에서 맨발 걷기를 했고, 올해 첫 입수도 했네요. 모래는 따뜻했고, 바닷물은 아직 좀 찼어요.




토요일 아침에 아주 조금만 부지런을 떨면, 에메랄드 바다쯤은 특별한 계획을 잡지 않아도 볼 수 있는 것. 멀지 않은 곳에 모네의 그림 같은 초록의 숲이 있다는 것. 일요일 미사 후에 산책이 좀 필요하면 애쓰지 않아도 해변에서 맨발로 걸을 수 있는 것.


내 주말이 이렇다고 말할 수 있어서 아직은 제주살이가 좋아요. 아무것도 안하고 하루 종일 집에서만 보내고 있어도, 내가 매일 잠들고, 눈 뜨는 여기가 제주라는 것. 큰맘 먹지 않아도, 애써서 시간을 빼지 않아도, 비싼 가격에 고심하며 항공권을 끊지 않아도 내가 원할 땐 얼마든 저런 주말을 보낼 수 있다는 것. 내가 10년이 다 되도록 아직 제주에 살고 있는 이유인 것 같아요.


이번 편지의 주제로 '주말'을 잡으면서 생각했어요. 아마도 우리 편지의 내용이 가장 극명하게 다를만한 주제가 아닐까. 언니의 지난 주말은 어땠나요. 조금은 부러워하지 않고 있을까 기대하며 편지를 써요. 사실 제주에 사는 것이 조금 쓸쓸하고, 버거울 때 누군가의 '부러워함'이 날 다시 힘내게 해 준 중요한 원동력이기도 했거든요. 후후. 가족과 함께하는 언니의 주말은 아마 조금 더 바쁘고, 따뜻했을 테니 지금부터 조금 부러워하며 기다리고 있을게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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